가까운 사람에 대해 우리는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평생을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고, 성인이 되어 분가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형제자매에 대해서도 그다지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상례(喪禮)에서는 임종(臨終)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임종자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살면서 절이고 삭혀두었던 정서를 가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남은 가족들 역시 돌아가시려는 분에게 마음 속 깊이 농축되어 있던 고밀도의 표현을 쏟아냅니다. 역설적이게도 마지막 순간에 임종자와 남은 자가 가장 맹렬하게 삶을 공유합니다.
사실 평소에도 우리는 소통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매번 소통에 좌절하고 소통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통을 시도할수록 상대방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벽을 대하는 것 같다고 소리쳤고, 각자 심정을 몰라준다고 과잉된 감정 표출로 소란스러워지기만 했을 뿐 진정으로 뜻이 통하고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소통에 다다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소통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소통이 조금 더 원활하게 될까요?
소통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점진적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의 순환이 시작되는 것(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소통하려는 상대가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서 소통은 불가능하고, 더욱이 상대와의 소통을 거추장스럽게 여긴다면 형식적인 말의 오고 감만 있을 뿐입니다. 서로 상대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고, 또 상대와의 상호작용을 절실히 원해야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소통 과정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이나 방식이 아닌 낯선 결의 생각과 방식이라 하더라도 수용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통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 강요하는 마음에는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동기가 숨겨져 있고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담겨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자기 입장의 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혹 설득이나 회유를 소통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소통 과정에서 갈등과 다툼이 있을 수 있으나 끝까지 상대와 함께 결론(합의점)에 도달하겠다는 마음(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직성이 풀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상대를 매도(罵倒)하는 것은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몹시 나쁜 전형(典型)입니다. 상대 이야기를 공감하면서 수용하는 부분이 커지고 끝까지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어렵더라도 소통의 종착점(합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소통에서 합의한 것은 현실화하여야 합니다. 소통의 결과가 소통 당사자들 사이에 현실화하여 경험될 때, 힘든 소통의 과정은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소통 자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현실에서는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소통은 애써서 시간 낭비한 것이 됩니다. 큰 것이 아니어도 아주 작은 것 한 가지라도 변화가 시작된다면 소통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