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8일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해 몽골 땅을 처음 밟던 날이었다. 두 시간 넘게 기다려도 마중 나오기로 한 살레시오회 신부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원활하게 되던 때가 아니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난감한 상황에 다행히 한국어를 아는 몽골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상황을 이야기하니 자기 휴대폰으로 신부님께 전화를 걸어주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마음 죄며 연락하니 다행히 주무시던 신부님이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깜박 잊었네요. 내일 오는 것 아니었나요?” 했다. 친절한 몽골 아저씨 덕분에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날 한국에서 신고 온 신발로 외출했다. 너무 춥고 발이 시려 얼어 죽는 줄 알았다. 한국과는 다른 혹한의 몽골 날씨에 무지했던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부츠를 사러 나랑톨시장에 갔다. 사람들이 추위에 치마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쓴 낯선 이방인들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동물 털로 만든 긴 부츠를 사고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집에 오니 온몸이 동태처럼 얼어있었다.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지는 한파로 가축들도 떼죽음 당하는 이곳 기후의 특성을 몰랐던 것이다. 돌아보니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 같다.
몽골 게르의 문은 낮다. 게르에 사는 가정을 처음 방문했을 때 게르 문에 머리를 부딪쳐 두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었던 적이 있다. 몸을 굽히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아침에 게르 문을 나설 때엔 바깥 모든 세상을 향해 몸을 낮추고, 일과를 마치고 들어올 때엔 밤 시간을 향해 몸을 낮춘다는 의미라고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는 복음을 이들은 모르지만, 일상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자연, 인간, 동물의 공존
몽골인들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본다. 산과 들에 있는 꽃과 나무를 꺾어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꽃과 나무는 원래 있던 자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목민들은 머문 자리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소들이 차도와 인도 구분 없이 갈 길대로 가는 모습을 흔히 본다.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소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몽골인들을 보면서 자연과 인간과 동물이 함께 공존하며 사는 것이 삶을 가장 아름답고 풍성하게 누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몽골 각지를 다녀보면 언덕 위 ‘어워’(owoo, 작은 돌무더기탑)와 그 위에 버드나무 기둥을 세워 신성한 천 ‘하닥’(khadag)을 매단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길흉화복을 비는 돌탑인 어워에 작은 돌들을 얹고, 주위를 세 바퀴 돌며 소원을 비는 전통 신앙이다. 치성을 드리던 우리의 옛 서낭당의 돌무더기와 신목과 다르지 않다. 몽골인들은 어워를 돌며 삶의 길에 무사 안전과 행운을 빈다. 가끔 외국인들도 소원을 비는 것을 본다. 어워 주위에 누군가 두고 간 목발도 보인다.
15년 몽골에서의 삶
처음으로 동네 산등성이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15년의 몽골에서의 삶이 물밀듯 다가왔다. 옆도 뒤도 돌아보는 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성찰을 해본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파란 하늘에 솜처럼 가벼이 구름이 떠다니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나는 새들과 모래바람조차 신기하게 생각됐다. 오랜만에 자연의 움직임을 눈여겨봤다. 아니, 15년 만에 처음인 듯하다. 그 안에서 몽골인들은 동네마다 있는 공동수도에서 우리나라 주유소처럼 돈을 내고 물을 받아간다. 집집이 상수도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초창기 겪었던 씁쓸하면서도 어이없었던 일화. 게르촌 입구에 우리 교육센터가 지어진 후 인근 게르에 사는 사람들이 와서 물을 달라고 부탁하면 센터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받아가도록 했다. 공동우물을 쓰는 게르촌 주민들에게 이 물은 그야말로 생명의 단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사무소 직원이 우리 센터에서 물을 길어다 먹은 사람이 배탈이 나서 우리를 고발했다며 찾아왔다. 우리 물을 먹고 배탈이 났으니 치료비를 내라는 것이었다. 공산 체제를 겪어서 그런지, 몽골에는 고발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지금이야 동네에 공동우물이 많이 생겨 센터까지 오지 않지만, 초창기 이곳은 더 열악한 곳이었다.
갑자기 모래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모래바람이 분다. 게다가 동네 도로는 거의 비포장이다. 차가 지나가면 모래바람 못지않은 먼지를 주민들이 온통 뒤집어쓰니 곤혹스럽다. 척박한 기후와 열악한 환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형언할 수 없이 안타깝다.
몽골은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는 학부모가 등하교를 책임져야 한다. 가끔 언니 오빠들이 동반하기도 한다. 어느 날 우리 학교 어린이들과 ‘지구를 살리기 캠페인’을 통해 거리 휴지 줍기를 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난데없이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이런 일을 처음 경험한 어린이들은 어리둥절하며 어쩔 줄 몰랐고, 경험해본 아이들은 당황한 친구들을 감싸 안으며 도왔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도 받아들이며 아이들은 서로 돕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십자가 등 성상 허용되지 않아
몽골의 학교에는 십자가상, 성모상과 같은 종교를 상징하는 어떠한 성상도 배치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다니는 곳곳에 작은 성모상을 놓았다. 아이들이 성모상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몽골 어린이 동요나 가요에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가 많고, 몽골 대중가요 70의 가사에는 ‘어머니’가 들어간다고 한다. 성모상을 가리키면서 이분은 ‘우리들의 도움이신 어머니’라고 하면,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느냐고 물으면 가정을 위해서, 특히 엄마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어느 나라든 어린이들은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는가 보다.
매년 학기마다 교육청에서 학교로 감사를 나온다. 그럴 때면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수녀들은 목에 건 십자가를 옷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래도 성모상은 그대로 놔둔다. 학교 복도에 장발장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그림 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복도를 오가며 그 그림을 봐왔는데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십자가를 감사원은 즉시 알아보고 퉁명스럽게 “이것 당장 치우세요”라고 했다. 잠시 그림을 내려놓았다가 감사원들이 간 후 다시 원위치에 걸어두었다.
한 번은 나의 목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본 4살짜리 유치원 어린이가 “씨스터 박샤!(아이들은 수녀님이 아니라, 수녀 선생님이라 부른다) 이게 누구예요?” 라고 물었다. ‘어떻게 대답할까?’하고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아이가 “십자가야!” 하고 말했다. 그 아이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십자가는 늘 궁금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물건이다.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들의 돌발 질문에도 십자가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철봉이 있는 운동장에 가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어린이들과 철봉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
복음 전파 활동이 제한돼 있지만
학교에서의 복음 전파 활동이 제한되어 있고 직접적으로 종교활동을 할 수가 없지만, 학생들이 우리를 통해 언젠가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수도회 창립자 요한 보스코 성인이 청소년들에게 늘 하셨던 “하느님은 너를 보고 계시고 너를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을 우리 학생들이 느끼고 체험하여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한다. 세상에 고귀하지 않은 생명이 없듯이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하느님을 알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으리라. 오늘도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우리를 통해 거룩함의 향기를 느끼길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