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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15) 십자가의 성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189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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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명인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십자가의 성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유다인이었지만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자서전을 읽고 가톨릭으로 개종해 가르멜수녀회에 입회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을 연구하면서도 지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봉사의 삶을 살았고, 1942년 8월 9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순교했다. 1999년 10월 시에나의 가타리나, 스웨덴의 비르지타와 함께 유럽 대륙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십자가의 성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의 삶에 대해 알아본다.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난 철학도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10월 12일 독일의 브레슬라우(현재는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한 독실한 유다인 가정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 슈타인은 에디트가 두 살 때 죽었고, 에디트는 유다인의 삶에 충실하고 근면하고 의지가 강했던 어머니 아우구스테 슈타인 밑에서 자랐다.

에디트는 총명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 아우구스테는 그에게 비판적 사고를 강조했고, 에디트는 유다교에 충실했던 어머니를 존경했다. 아우구스테는 남편 지그프리트가 남긴 가업을 이어가며 철저하게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하지만 십대에 이르러서 에디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됐고 무신론에 빠졌다. 그는 “양심에 따라 내 의지로 기도하기를 멈췄다”고 회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에디트는 브레슬라우대학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전공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독일어와 역사를 전공했지만, 그는 철학과 여성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다. 1913년 에디트는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제자가 됐고 조교를 맡았다. 후설은 나중에 에디트의 박사 논문을 돕기도 했다.

에디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호 업무를 배워 오스트리아의 야전병원에서 일했다. 전염병 전문 병동과 수술실에서 일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 후설의 밑에서 다시 박사 학위를 준비했으며, 1917년 ‘감정이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에디트는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써줬지만,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꿈을 이루지 못했다.



개종과 가르멜수녀회 입회

1921년 여름, 후설의 다른 제자였던 헤드비그 콘라드-마르티우스의 한 농장에 방문한 에디트는 서재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책을 만났다. 바로 아빌라의 데레사 자서전이었다. 밤새 책을 읽은 에디트는 “책을 다 읽고 나 자신에게 ‘이게 진실이야’라고 말했다”고 훗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해 왔으며,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달았다.

에디트는 1922년 1월 1일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바로 브레슬라우로 가서 어머니에게 자신이 가톨릭신자가 됐음을 알렸다. 에디트의 대모였던 헤드비그는 당시 “두 모녀가 서로 껴안고 울었다”면서 “이들은 거짓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요한 1,47 참조)”고 전했다.

세례를 받은 에디트는 곧바로 가르멜수녀회에 입회하려 했지만 지도신부의 만류로 입회를 연기했다. 대신 1931년까지 도미니코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와 사범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도 에디트는 뉴먼 추기경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썼던 서한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론」을 번역했다. 또 자신의 현대 철학 연구도 계속했다. 후설의 관념론적 철학을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실재론적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이론수도원의 라파엘 발처 대수도원장으로부터 가르멜수녀회 입회를 허락받았다. 에디트는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가르멜수도원에 입회했고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가 된 에디트는 1935년 4월 21일 유기서원을 했고,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했다.

종신서원 상본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남긴 “이후로 나의 유일한 소명은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새겼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순교

나치의 유다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다. 쾰른의 가르멜수도원 원장 수녀는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를 비밀리에 네덜란드의 에히트 수도원으로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수도원의 허락을 받고 계속해서 연구와 저술활동을 했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했다.

네덜란드에서도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안전하지 못했다. 1942년 7월 20일 네덜란드 주교들이 나치의 반유다주의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나치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로 개종한 모든 유다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해 8월 2일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에히트 수도원에서 함께 지내던 언니 로자와 함께 체포됐다. 그는 로자에게 “자, 이제 우리는 우리 백성들에게 가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다른 수많은 개종한 유다인과 함께 임시수용소를 거처 8월 7일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리고 8월 9일 가스실에서 순교했다.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나의 형제자매들이 이렇게까지 고통받을 줄은 몰랐다”면서 “이들을 위해 매시간 기도하면 주님께서 고통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분명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는 1987년 5월 1일 독일 쾰른대성당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그는 순교자로 시복됐는데, 그가 죽은 것이 유다인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신앙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교황청은 네덜란드 주교들이 나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에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가 죽게 됐다면서, 그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라고 인정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8년 10월 11일 봉헌된 그의 시성식 강론에서 “에디트 슈타인이 경험한 영적 여정은 특별한 내적 회개를 잘 드러내는데, 진리를 찾던 한 젊은 여성이 주님의 은총으로 순교자이자 성인이 됐다”면서 “이스라엘의 걸출한 딸이자 교회의 충실한 이 딸을 온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한다”고 밝혔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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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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