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기가 비행기 안에서 날카롭게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륙부터 시작된 찢어지는 울음은 비행 내내 간헐적으로 들리다가 착륙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어른에겐 잠시 귀가 멍해지는 기압의 변화이지만 민감한 아기에겐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귀가 아파 우는 아이는 달랠 수도 설득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기 부모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함께 감당해야 했습니다. 승객 모두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도착할 때까지 아기의 울음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무척이나 피곤하고 짜증도 났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기의 울음을 접하게 됨으로써 그전까지는 무심히 지나치던 기압의 변화라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나도 저 아기보다 훨씬 어릴 적에 많이 놀랐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럼에도 이미 다 큰 어른으로서는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작은 약자의 고통은 강한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되레 짜증만 납니다.
성인 중에도 그런 사람을 보면 “나약한 생각을 하니 그렇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같은 말을 합니다. 함께 있어주고 이해도 하지만 점점 지쳐갑니다.
게다가 세상은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피할 곳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은 점점 귀를 막고 안 보는 방법을 고도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의 원인이 개별적인 사례만 관찰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개인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약 100년 전, 뒤르켐이란 학자는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개념을 학계에 정착시켰습니다.
탄광에서는 카나리아라는 새를 둡니다. 탄광 내 유독가스가 생기면 민감한 카나리아가 먼저 쓰러졌고 사람들은 이를 보고 대피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도 어려움이 생길 때 늘 약한 순서대로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들이 쓰러진 의미도 모른 채 쉽게 눈을 감았고 또 쉽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한 사회 안에 있는 모두는 같은 고통을 겪지만 각자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 다가오는 정도는 매우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그 고통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다면 그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그 사회의 어느 부분이 병들고 고장 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세상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 가족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지금 울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는다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 사회는 더욱 병이 들어갈 것입니다.
세계 1위의 자살률 국가,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적게 낳는 국가의 뒤에는 행복하지 못한 사회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보내는 경고가 아기의 울음소리처럼 귀에 맴돕니다.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