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특수학급 교사 김정인 (비비안나)
몽골 다르항 돈보스코 센터 본당에서 묵상을 하고 있는 김정인 교사.
교사가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인 방학, 그 방학을 이용해 매번 해외로 나가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교사가 있다.
살레시오회 국제청소년지원단 취재차 최근 본지가 몽골 다르항 돈보스코 센터에서 만난 원장 이호열(살레시오회) 신부를 물심양면 돕고 있던 안성시 경기창조고등학교 김정인(비비안나) 특수학급 교사다.
그는 방학 때마다 해외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후원만 수십 군 데 하고 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는 학생들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28년 차 교사인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올 여름 방학 몽골로 떠난 김정인 교사가 몽골 다르항 돈보스코 센터에서 현지 학생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
나누는 삶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몽골 등 수많은 나라를 다녔습니다. 그중 네팔만 21번을 갔네요.”
김 교사는 학기가 끝나면 어김없이 비행기에 오른다. 교사 생활 10년 차이던 2005년 인도로 순수하게 배낭여행을 떠난 게 시작이었다. 이후 2010년 떠난 네팔에서 우연히 한 인도 신부를 만났다. 김 교사는 밀림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는 사제의 말을 듣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산 하나를 넘어 꼭대기에 다다라서야 학교가 보였다.
“단층 건물에 흙벽이고, 화장실도 고랑 하나 판 게 전부였습니다. 더구나 창문인데 유리도 없었죠.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수업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학교에 오기 위해 6살짜리 아이가 산을 두 개나 넘어서 온다더군요.” 이때 교사로서 또 다른 차원의 소명을 느낀 그는 바로 후원을 결정했다.
그는 또 네팔 여행 중 우연히 수녀원에 머물게 됐다. 한 수녀와 둘이서 일주일을 지내게 됐는데, 그 수녀는 네팔의 빈민가 포카라 프리티비촉에서 공부방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때 그 지역 사람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는 수녀의 요청에 그는 곧바로 고가의 카메라를 구입해 동행했다. 김 교사는 사진을 찍으며 속속들이 그곳 사람들의 사연을 들었고, 그중 근육병으로 고생하는 청년을 위해 기꺼이 후원자가 됐다.
또 네팔 현지에서 지적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함께 카페를 운영해 나가고 있다. 필요한 기구와 집기들을 김씨 사비로 구입했고, 직원 두 명의 월급도 그가 내주고 있다. 방학이면 직접 방문해 제과제빵과 커피 내리는 법도 가르쳐주고 있다. 그렇게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하나둘씩 나눔이 늘어 정기 후원 액수만 연 1000만 원이 넘는다.
“눈에 그런 친구들이 보였고, 또 저에게 왔다는 것은 나누고 도와주라는 뜻이라 여겼죠. 많진 않지만, 월급도 몇만 원씩은 오르거든요. 또 결혼을 안 했으니 더 자유롭게 하고 있습니다.”
천직
김 교사의 ‘연민’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 집 앞을 지나가는 입술이 파란 소년을 봤습니다. 심장병이라고 생각했죠. 나중에 크면 저런 아이들을 돕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가 6학년 때엔 발달장애 학생과 같은 반이었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로 진학해 같은 반이 됐다. 당시엔 장애 학생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던 때라 담임은 김 교사에게 그 친구를 도와주라고 했다. 이때 처음, 그가 했던 도움을 통해 특수교사의 역할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특수교사의 꿈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잠시 수도 성소를 꿈꿀 때를 빼곤 말이다.
그토록 원하던 특수교육과에 진학한 김 교사는 입학하고서도 남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대학교 1학년 때 본당 신부 소개로 28살 지적 장애 언니를 알게 됐다.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말벗이 돼줬고, 옷 입는 것까지 곁에서 도왔다. “다른 단어가 달리 생각 나지 않지만, 그게 저의 첫 봉사활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학교 선배를 통해 20~80대 장애인 18명이 모여 사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센터도 알게 됐다. 그는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직접 반찬을 만들어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늘 센터로 향했다. 밥하고 청소하고 목욕도 해줬다. 그리곤 월요일 새벽에 나와 곧장 학교로 가 수업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너무 가볍고 기뻤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그런 저를 진심으로 반겨줬고요.”
특수교사의 삶
학생 때의 이러한 산교육은 교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1996년 첫 발령을 받고 교실로 들어섰을 때 한 학생의 얼굴에 눈길이 갔다. 왼쪽 볼 아래에서 진물이 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화상이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진물이 계속 나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피부암이 될 수 있으니 수술을 권유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가정에 기초생활보장수급자라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김 교사는 곧장 주변에 도움을 청했고, 어린이심장재단이 응답해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입원 기간 내내 밤새 간호하고 아침에 출근했다. 교사 첫해를 그렇게 보냈다.
누군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김 교사는 불의에도 침묵하지 않았다. 고등학교가 의무교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문고에 특수학급이 없었다. 그 인근에 사는 장애 학생들은 달리 방도가 없어 멀리 다른 지역으로 통학해야만 했다. 이를 본 김 교사는 마음이 맞는 학부모들과 함께 학급 신설을 요구했지만, 지역의 중·고등학교 교장과 해당 학교 동창회까지 나서서 반대했다. 끈질긴 싸움 끝에 결국 신설됐고, 이후 또 다른 곳에 옮겨서도 시골에 특수학급을 만들었다. “깊은 숙고 끝에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바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연민에서 나오는 그만의 힘이다. 그는 “그럴 때마다 꼭 주변에 기도 부탁을 하고, 개인적으로도 화살기도를 수없이 바친다”며 “그럼 어떤 결과로든 응답을 주신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해보고 싶은 일은 원 없이 다 해봤다”고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해 학생들과 카페를 운영해보기도 했고, 천연 화장품 제조 강사 자격증도 따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모두 사비를 털어 배우고 진행한 일이다. “어쩌다 보니 처음 물꼬를 튼 일들이 꽤 있네요. 정말 후회 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김 교사는 현재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교권 침해 문제에 대해서도 입을 뗐다. 그는 “무엇보다 교사와 학부모, 학생 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며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 문제의 발화점”이라고 했다. 이어 “인권은 교사든 학부모든 학생이든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현실적인 안전장치가 마련될 필요가 있고, 대립 차원에서가 아니라, 어찌 됐든 지금 이 시점이 다시금 교권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적기라고 본다”고 말했다.
10년 전, 김정인 교사가 네팔의 포카라 프리티비촉 빈민가에 마련된 해피홈에서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자유를 꿈꾸며
특수학급 교사로, 신앙인으로, 인간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자유를 꿈꾼다. “저는 자유로운 영혼이거든요.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내 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순수한 자유를 말입니다.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이게 내가 꿈꾸던 삶이지’라고 할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 전에 또 어디론가 떠나겠죠?”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