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톨릭 문학의 대표작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17세기 일본 천주교 박해시대를 살던 크리스토방 페레이라 신부를 모델로 삼아 탄생한 작품이다. 「침묵」은 순교가 아닌 배교를 다룬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순교이고,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 배교다.
페레이라 신부는 순교 열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박해자들에게 체포돼 오물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받고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배교하고 말았다. 페레이라 신부는 배교 후 자비의 원천인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인간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회의를 품었다.
가톨릭신자들은 순교자를 존경하고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지만, 배교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불편해 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을 지키겠다던 신자들이 무엇 때문에 배교를 했을까, 배교자는 믿음이 약했던 사람들이었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 얼마나 배교했을까
순교사를 다룬 사료들은 대부분 순교자를 발굴하고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 배교자를 기록한 사료는 빈약할 수밖에 없다. 배교자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순교자와 배교자 모두 교회의 구성원이었고, 배교자 중에도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을 회복하거나 결국 순교자가 됨으로써 교회 발전에 기여한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성례는 옥에 갇혀 수난을 당하다 어린 아들들에 대한 애끓는 모정에 이끌려 배교했지만 다시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각오하고 순교했다. 이성례는 2014년 8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시복식을 통해 복자로 선포됐고 현재는 한국교회에 의해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이성례처럼 ‘배교-회심-순교’의 과정을 거친 순교자들로는 복자 홍재영(프로타시오), 하느님의 종 장사광(베드로) 등 다수 사례가 있다. 회심을 거쳐 순교에 이른 사례를 통해서도 배교하며 받았을 고통과 고뇌가 지극히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방상근(석문 가롤로) 박사가 2019년에 발표한 논문 ‘박해시기 조선 천주교회의 배교자와 회심자’에 의하면,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율은 62, 1839년 기해박해 때는 48, 1866년 병인박해 때는 54다. 전체적으로 보면 순교자보다 배교자의 비율이 약간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방상근 박사는 이와 관련 “기존 배교자 통계가 「사학징의」, 「기해일기」,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포도청등록」 등 제한된 사료만을 토대로 하고 있어 한계가 있지만 관변 측 기록에는 배교 비율이 50를 넘고 있어 체포된 신자 중 절반 이상은 배교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교하고도 처형된 신자들도 있어 배교율은 좀 더 올라갈 개연성이 있다.
■ 왜 배교했을까
박해가 없는 시기를 살고 있는 오늘의 신자들은 ‘배교’라는 말에서 신앙이 약해 하느님을 저버렸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일본 천주교회사에서는 일정 지역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면 영지 전체 주민이 천주교로 집단 개종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은 가톨릭 교세 확장을 위해 다이묘를 우선적으로 선교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다이묘에 의해 집단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영지 주민들은 박해가 가해지면 집단으로 배교하는 비율이 높았다. 배교를 거부할 수 있는 신앙과 교리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교회 박해시기에 배교를 택해야 했던 신자들은 신앙이 약해서 배교를 했다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일본교회에서도 다이묘에 의해 집단 개종한 뒤 집단 배교하는 것은 특이 사례였을 뿐, 16세기 이후 19세기까지 이어진 긴 박해기간에 3~4만 명이 순교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가 났다는 것은 배교자에게도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이 가해졌다는 뜻이다.
교회사 사료들에 나타난 배교 사유들은 가족과 가까운 친지가 형벌을 받는 모습을 본 충격, 가족 안에서 가해지는 박해도 있고, 천주교를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박해 이후에 알게 됐다는 경우 등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이들을 배교시킨 동기는 관헌에 체포된 뒤 받은 혹독한 악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방상근 박사도 “한국천주교 박해시기 배교 사유의 대부분은 형벌의 고통, 죽음의 공포와 같은 물리적 힘과 타율적 강박”이라고 설명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곤장을 치거나, 나무 송곳으로 손톱 밑이나 몸 곳곳을 찌르고 주리를 트는 형벌은 흔한 것이었고 돌에 머리를 치거나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씌워 질식시키기도 했다. 또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밀어 넣어 생매장하는 등 배교를 강요하기 위한 고문은 가혹함 그 자체였다.
일본교회 순교사를 다룬 「일본의 천주교 수용사」는 17세기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 땅에 발을 디뎠지만 체포돼 잔인한 고문 앞에 배교했던 역사를 보여 준다. 「일본의 천주교 수용사」 저자 조셉 제네스는 선교사들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기나긴 고문과 정신적 굴욕으로 배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평생 도덕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형벌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인지상정을 따랐다 해도 통회, 회심한 이의 신앙을 단죄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 배교자에게 무엇을 보아야 할까
교회와 관변 측 기록에는 배교한 많은 신자들이 나오고 그 중에는 회심을 거쳐 순교한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배교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미진한 것이 현실이다. 방상근 박사는 “배교자도 한국교회사의 일부이고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부분도 있다”며 “한국교회사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배교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1990년대 들어서 대두됐다”고 말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스테파노) 신부는 “배교자라는 용어는 순교자와 양 극을 이루는 것처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인식되고 있어 과연 적절한 용어인지 고민이 필요하다”며 “배교자가 왜 배교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배교자와 순교자 모두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오늘을 사는 신자들도 사회와 직장, 가정에서 불의 앞에 침묵하고, 선이 아닌 악을 택하는 모습은 박해 앞에서 배교자가 걸었던 길과 비슷하다”면서 “배교자의 신앙이 약했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원주교구 순교자현양회 초대 위원장 배은하(타대오) 신부 또한 “103위 성인, 124위 복자와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들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을 제외하면 모두 순교자들”이라며 “순교자가 아닌 박해시대 신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의 관심이 부족했던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어 “비록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박해시대를 겪은 신자들의 삶은 박해가 없는 현대 신자들에게 보다 충실한 신앙을 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