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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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이전부터 돈독했던 한국과 교황청 교류의 역사

한국·교황청 수교 60주년 수교 당시의 기록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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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한 교황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왼쪽)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공

 

안토니오 델 주디체 초대 주한 교황공사(왼쪽)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후 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은 정일권 외무부 장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공 

 


올해는 대한민국과 교황청 수교 6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는 ‘HELLO 대한민국, HELLO 교황청’을 주제로 공개대학을 연다. 6일부터 11월 1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서울대교구 영성센터(명동대성당 내 옛 계성여고)에서다. 이번 공개대학은 수교 이전인 19세기 박해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황청과 한국 교회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사를 7회에 걸쳐 조명한다. 본지는 강연에 맞춰 공개대학 강의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한국과 교황청의 수교 당시 정황은 어떠했을까. 강연에 앞서 당시의 기록을 다시 살펴봤다. 다음은 그때의 기록에 관한 일문일답.


- 수교 이전에 한국과 교황청 사이 교류가 있었나?

일찍이 한국은 정부 수립(1948년) 이전부터 교황청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시작은 1947년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의 부임이었다. 해방 후 첫 번째 외교 사절이 바로 교황사절이라는 점은 신생 국가인 한국에 큰 힘을 실어줬다. 이듬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도 교황청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훗날의 성 바오로 6세 교황)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훗날 성 요한 23세)가 유엔 한국 대표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이 내린 지시였다. 덕분에 수석대표 장면(요한) 박사는 한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받는 쾌거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어엿한 국제사회 일원으로 인정받도록 힘쓴 주체가 바로 교황청이다.



- 한국과 교황청은 언제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나?

한국 교회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된 지 이듬해인 1963년 12월 11일이다. 한국과 교황청은 “상호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공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고 공동 발표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주한 교황공사관 설치를 공포하고, 이제는 교황 사절(공사급 대우)이 아닌 교황 특권공사를 파견할 것이라 전했다. 아울러 한국 정부도 특권공사를 바티칸에 상주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비밀 해제된 한국 외무부(현 외교부) 문서를 보면 “한국과 교황청이 1963년 12월 11일 오후 1시(영국 그리니치 표준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수교 사실을 공동 발표하기로 합의했다”고 적혀 있다. 또 문서에는 로마는 당일 석간, 서울은 이튿날 조간신문에 이 내용을 게재할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 말대로 12일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등 국내 주요 신문은 이 소식을 1면에 보도했다.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도 12월 25일(주님 성탄 대축일)자 신문에 낭보를 실었다. 한국 ‘성청(교황청의 옛 표현)과 외교 수립’이라는 제목의 2면 기사는 한·교황청 수교 의의를 이같이 설명한다.

“오늘날 바티칸 외교망은 공산권을 제외한 세계 전역에 뻗쳐져 있는 만큼 이러한 강력한 외교진용을 가진 성청과 이번에 우리나라가 공사교환을 하게 된 것은 우리 외교의 전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해외 가톨릭 언론도 양국 수교 소식을 전했다. 미국 주교회의가 운영하던 통신사 ‘가톨릭뉴스서비스’(CNS)가 12월 12일자로 “교황청과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고 보도하자, 미국 교계 언론은 일제히 이를 인용했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암레토 지오반니 치코냐니 추기경 서명이 있는 문서로, 1963년 12월 11일 주한 교황공사관으로 승격하는 바오로 6세 교황 대칙서 원본이다.


- 양국이 수교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한국 외무부는 1963년 2월 18일 당시 이찬종 주이탈리아 대사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교황청과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을 검토하고, 수교 시 얻을 이점 등을 보고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조사를 마친 이 대사는 5월 외무부에 보고를 올렸다.

“교황청의 외교 활동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남미 20개국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우리나라가 국교를 조속 수립할 경우 제18차 유엔 총회 시 추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사의 보고를 계기로 한국과 교황청의 수교 움직임은 급물살을 탔다. 1963년 7월 10일 김용식 외무부 장관이 한국 정부 관리로는 처음으로 성 바오로 6세 교황을 단독 예방했다. 이에 교황은 미소로 그를 환대하며 한국과 장차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김 장관은 훗날 당시 만남을 회고하며 교황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자기의 기도 속에 늘 한국이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 국민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말했다. 교황은 분단국가 국민이 겪어야 하는 슬픔에 대해 그의 깊은 자비와 동정을 표했다. 인자한 교황의 모습은 성자의 모습 그대로였다.”(동아일보 1984년 1월 24일자)

1963년 9월 외무부는 당시 교황사절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에게 “교황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공사급 사절 교환을 희망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주디체 대주교는 10월 26일 교황청도 “한국과의 수교를 환영하며, 가능하면 대사급 사절 교환을 바라나 한국이 공사급을 원한다면 공사급 사절 교환도 무방하다”고 통보했다고 알려왔다. 이로써 입장 확인을 마친 한국과 교황청은 실무 작업을 마치고 12월 11일 마침내 수교를 발표했다.



- 초대 주한 교황대사와 초대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누구인가?

양국이 정식 외교를 맺음으로써 주한 교황사절 델 주디체 대주교는 초대 주한 교황공사로 승격했다. 주디체 대주교는 3년 뒤인 1966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으로 격상하면서 초대 교황대사가 된다. 가장 최근 교황대사는 제11대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2018~2023년)다. 슈에레브 대주교가 지난 6월 퇴임하면서 현재는 1등 서기관 페르난도 두아르치 바로스 헤이스 몬시뇰이 대사직을 대행하고 있다.

초대 주교황청 한국 공사는 이한빈 주스위스 대사가 겸임했다. 이후 1967년 정일영 주스위스대사가 초대 대사를 맡았다. 겸임이 아닌, 첫 주교황청 상주대사는 1974년 부임한 초대 해병대 사령관 출신 신현주(요아킴) 대사였다. 그는 최초의 가톨릭 신자 주교황청 한국 대사이기도 하다. 현재 주교황청 한국 대사는 신현준 대사를 초대로 삼고 있다. 이후 가톨릭 신자 출신이 대사를 맡는 전통이 유지됐으며, 현재 제17대 오현주(그라시아) 대사가 활동 중이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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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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