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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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9) 선교와 시노달리타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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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에서 2018년 발간한 문헌 제목은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La sinodalit? nella vita e nella missione della Chiesa)」이다. 문헌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으로 ‘사명(mission)’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신학적 성찰이나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극히 미비하다는 현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과연 교회의 삶을 선교사명과 분리하여 논의할 수 있는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순례하는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이며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삶이라는 차원 역시도 선교적이어야만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교회를 제대로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를 말하면서도 선교에 관심을 두지 않고 기피하는 듯한 이러한 교회 현실과 달리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내부(ad intra)를 향해 또한 교회 밖(ad extra)을 향해 변화와 쇄신의 움직임을 촉발하고 있다.

선교하는 제자인 ‘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제자들에게 단 하나의 사명만을 맡겨주셨다. “아버지께서 […] 하라고 맡기신”(요한 17,4) 바로 그 일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똑같이 맡겨주셨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는 교회에 있어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는 특별한 관심과 흥미를 지닌 특이한 개인이 참여하거나 특정 단체에 할당된 의무처럼 여겨졌다. 반면 시노달리타스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 모두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본성 즉 주체성을 부여받았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행사하는 주체성은 비단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생활과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ad extra), 세상으로 나가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도 기대하시는 바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 구원을 받게”(요한 3,17)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모든 신자는 받은 은사와 직무가 다르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이 단 하나의 사명에 부름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자기들끼리 함께 머물러 있기보다는 사람들을 향해 나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하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직책이 무엇이든,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선교하는 제자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이다.

우리는 선교하는 제자들

또한 시노달리타스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서 명확한 지침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선교는 언제나 ‘나’라는 유능한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활동으로 표현된다. 이방인의 개종에 있어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도 바오로조차 혼자서 활동하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했다. 이는 교회가 선교활동을 수행할 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모습이다. 바로 세례받은 ‘우리’ 모두가 여정의 동반자이며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함께 참여하도록 불림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이기에 자기 밖으로 또한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파견됐다.

그러므로 시노달리타스는 선교에 있어 ‘나’에서 ‘우리’로 시점의 확장과 전환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유한 ‘나’의 모습이 존중받고 다양성이 공존하며 하나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시는 성령의 힘으로 일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적 ‘우리’는 선교적이기에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 교회 담장을 넘어 밖으로 확장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선교적 차원의 역동성은 보편적 형제애를 지향한다고 가르친다. 함께 걷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는 보편적 형제애에 대한 요청에 응답하며 모든 이들을 여정의 동반자로 인정하며 대화하고 만나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리고 선교에서도 같은 모습을 이루기를 촉구한다. 타종교의 신자들과 세상과 문화 그리고 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경청하고 대화하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한다.

복음, 교회와 세상의 기쁜 소식

가라지의 씨앗이 아닌 복음의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결코 교회의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시대는 세속주의의 현상과 상대주의에 잠식된 채 보편적 가치가 아닌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 주관성, 과학 문물과 기술의 발전에 바탕을 두고 변화하는 시대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세계관에 대한 전통적 이념과 종교적 관념과 규범 등을 쓸모없거나 시대에 뒤떨어져 도태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이러한 시대 현실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선교는 자칫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이게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선포해야 하는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 ‘복음’이라고 불리지 않고 세상에서도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고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세상의 상황과 현실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실제로 복음은 구체적인 상황, 그리고 고유한 문화와 사회 안에서 육화되어 이해될 때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된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이를 듣는 이들의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주어야 비로소 생명을 주는 구원과 해방의 말씀이 된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복음의 빛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사회에 헌신하며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대전교구 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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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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