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온 편지’에 저의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너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신문에 기고되는 내용이지만, 편지니까 편안하게 선교지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나누면 되겠다!’ 편지를 띄울 수 있고, 제 편지를 받는 분들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흙탕길 헤치며 드리는 미사
우기 때, 주일 미사가 있는 날이면 꼭 오전에 일찍 출발해 가야 하는 공소가 있습니다. 공소가 산 아래에 있는데, 그 길은 경사가 있는 비포장길이며, 우기 때마다 심각한 진흙길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전보다는 오후에 비가 많이 오기에 우기 때면 우선순위에서 가장 먼저 염두에 두고 미사를 하러 가는 곳입니다.
우기이던 어느 날, 주일 오전 미사 중에 비가 내렸습니다. 그렇게 많이 오진 않았기에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사 후 다음 공소로 가려고 차로 비포장 경사길을 오르는데, 차가 갑자기 미끄러지기를 한두 번 하더니, 결국 길이 깊게 파여 빠져버렸습니다. 차는 오르지 못했고, 심지어 길 밖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닙니까! 안절부절, 근심걱정, 갈팡질팡. 이런 제 모습을 보고 근처에 있던 신자분이 와서 제게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무(Amu)~!”
‘Amu’는 동티모르어인 떼뚬어로 ‘신부’입니다. 그는 저를 부르긴 하셨지만, 그 상황을 보고 같이 ‘얼음’이 된 듯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라지더니 얼마 후 마을 신자들을 우르르 데리고 오셨습니다. 밧줄을 갖고 온 신자 분들, 삽을 들고 온 신자, 심지어 돌을 들고 온 이까지. 그러면서 다들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무(Amu)~!” 그리고 그들은 이내 웃는 얼굴로 저를 위로해주고, 안심시켜주셨습니다. 함께 올라온 아이들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재미있다는 얼굴입니다. 저도 얼굴은 웃긴 했지만, 속으로는 ‘아, 민폐를 끼쳤구나! 이런 민폐쟁이 이동철! 아이쿠~’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드디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됐습니다. 앞에서 차를 당기는 신자들은 함께 미끄러지며 넘어져 진흙 범벅이 되고, 뒤에서 차를 미는 신자들은 진흙이 튀어 역시 같은 진흙 범벅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죄송했던지요. 어디 숨고 싶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 공소로 다시 돌아왔고, 예정에 없던 1박을 그곳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1박에도 따듯하게 맞아줘
멍하니 있는데, 신자들은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게도 예정에 없었지만, 공소 신자들에게도 계획에 없던 사제의 1박이 생긴 상황이었기에 식사와 잠자리 준비로 분주하게 된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복사단과 자매님들, 그리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시는 공소 회장님과 교육분과장님까지. 예정에 없었음에도 사제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공소 신자들을 보며, 감사함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화전민들인 그들은 나무를 해서 음식을 준비했고, 사제가 먹는 식사라고 해서 달걀후라이라는 특식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집에서 가장 깨끗한 침구류 세트도 내주셨습니다.
역시나 아이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공소에 몰려와 신이 난 얼굴로 함께 있어 줬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이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습니다. 바닥이 온돌도 아니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라 새벽에 춥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신자들은 제가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음식을 해주셨고, 새벽 6시에 공소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환대였고, 귀한 만찬이었습니다.
신자들에게 느끼는 감사함과 미안함
일정을 미리 잡고 공소를 방문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온 마을 사람들이 공소 성당으로 와서 맞이해줍니다. 이때에도 그들은 음식을 준비합니다. 계획된 일정이라 음식도 많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제가 먹고 남은 음식은 복사단이 주방에서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맛있는 반찬은 복사단 아이들에게도 맛있는 것이기에 조금만 먹었습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땐 맛있는 음식이라면 생각 없이 먹고 싶은 대로 먹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복사단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신자들이 예기치 않게 저희 수도원으로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대부분 아파서 약을 달라고 하거나 다쳐서 치료해달라고 오는 경우입니다. 잠깐 이야기 나누며 약을 드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찾아오는 시간이 제가 강론을 쓰는 시간에 큰 영향을 주진 않습니다. 지금도 떼뚬어가 많이 부족하지만, 초반엔 얼마나 부족했을까요? 아마 강론을 준비하며 애쓰는 저보다 그 강론을 듣는 신자들이 더 애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강론을 쓰고 있는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창문 너머로 눈을 돌리니 아이들이 수도원 성당 앞 꽃밭에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나가서 물었습니다. “애들아~ 무슨 일이야?” 아이들은 “아무(Amu)~ 잡초 뽑으러 왔어요”라고 답합니다. 저의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잡초가 무성해져 지저분해진 것을 아이들이 알아채고는 깨끗하게 해주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엔 4살 아이도 있었습니다. 고마움도 있었지만, 또 얼마나 미안하던지요. 제가 해야 할 일을 아이들이 대신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남에 따라 제 머릿속은 ‘강론 써야 하는데…’하는 것에만 머물러 아이들을 빨리 돌려보낼 생각만 했습니다. 많은 신자의 환대를 받으며 감사했던 제가 저를 도와주겠다고 기꺼이 온 아이들을 환대가 아닌 오히려 빨리 돌려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강론을 쓰며 성경 속에서 만난 예수님을 강론으로 풀어낼 생각만 했지, 뜻밖에 찾아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 냄새 나는 동티모르 신자들
동티모르의 신자들을 보면서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그 느낌을 자주 느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느꼈던 그것과는 다른 ‘사람 느낌’입니다. 그날을 돌아보면 그들의 신앙 속에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믿음을 봅니다. 신앙을 자신들의 삶에 중심에 두고, 그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선교 사도직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들이 저를 대상으로 선교 사도직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는 정말 그들을 통해 신앙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에 휴가를 가게 되면, 어떤 신자분들은 제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봅니다. 한국에서 보면 힘들 수 있습니다. 세계 최빈국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들 속에서 살다 보면 저희 수사들보다 더 불편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고 계시는 분들이 많기에 오히려 저는 ‘동티모르에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진 않은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는 화전민들이 아닙니다. 전기가 들어올 땐 인덕션을 사용하고, 정전되면 가스 불을 사용합니다. 정전이 3일 정도 이어지면 냉동실 고기에서 핏물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기를 보관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과학 문명을 누리고 살고 있는 저희들입니다. 힘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더 젖어들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