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는 생전,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세 가지로 “아기 목구멍에 젖 넘어가는 소리가 하나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또 하나요, 자식 책 읽는 소리가 또 하나”라 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삶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말씀을 품고 봉헌하는 ‘기도 소리’가 아닐까. 특별히 성지와 순례지를 거닐며 되뇌는 묵주기도는 거룩한 순교의 자취와 어우러져 그 어떤 소리보다 듣기 좋은 소리로 다가온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묵주기도 성월. 번잡함에서 벗어나 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묵주기도를 봉헌할 수 있는 순례지 두 곳을 소개한다.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묵주기도 호수’
제주 한라산 중산간 성 이시돌 목장. 너른 들판의 말, 그리고 이라크 고대도시에 기원을 둔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 테시폰(Cteshphon)이 만든 이국적인 풍경으로 관광객 발길이 이어지는 소위 ‘핫플레이스’다. 하지만 신자들을 위한 핫플, 기도 명소는 가까운 곳에 따로 있다.
목장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성 이시돌 센터를 지나 10여 분 숲길을 걸으면 커다란 십자가 너머로 제주의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새미 은총의 동산 ‘묵주기도 호수(Rosary Lake)’다.
오름이 만든 분화구에 자리한 인공호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묵주다. 십자가 아래 새겨진 사도신경을 시작으로 호수 가장자리 둘레길을 걸으며 묵주기도 15단을 봉헌할 수 있다. 둥근 회양목 한 그루는 묵주 1알을 의미한다. 삼나무숲과 가을 억새를 배경 삼아 한 단 한 단 기도를 봉헌하면 어느새 400여 미터 묵주기도의 길을 한 바퀴 돌아 처음 십자가를 만난다. 둘레길에는 십자가의 길 13, 14처도 자리해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 사이 예수님 모습을 묵상할 수 있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12개 주요 사건을 표현한 ‘예수님 생애공원’, 십자가의 길과 삼위일체 대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새미’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짐을 뜻한다. 이름 그대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묵주기도의 호수는 오늘도 그 자리에 고요히 머물며 순례자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
※성 이시돌 센터(새미 은총의 동산)-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53, 064-796-7191
수원 요당리성지 ‘묵주기도의 길’
‘성모 성월엔 죽산, 묵주기도 성월은 요당리.’
만개한 장미터널 그늘 삼아 묵주기도를 봉헌할 수 있는 죽산성지가 봄의 순례지라면, 요당리성지는 장미 못잖게 붉은 빛을 뽐내는 단풍나무 아래를 걸으며 성모송을 바칠 수 있는 가을 순례지다.
장주기 요셉 성인과 장 토마스 복자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 바로 이곳 요당리다. 또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공소회장을 지냈고, 성 앵베르 범 주교가 박해를 피해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최초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돼 의미를 더하는 성지는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의 발자취도 함께 아우르는 수원교구의 대표적 신앙 유산이다.
수많은 성인의 발자취가 스민 거룩한 땅은 이제 기도의 땅으로 거듭났다. 성지 기도의 광장 중앙에는 두 팔 벌린 성모님과 엄마 치마폭을 꼭 붙든 아기예수상이 서 있다. 성모상을 바라보며 왼편으로 묵주기도 길, 반대로는 십자가의 길이다. 줄지어 늘어선 150여 그루 붉은 단풍나무가 햇살을 가려 주고 나무 사이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기도를 돕는다.
묵주기도 길 어디에서도 광장의 성모님과 붉은 벽돌 대성당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요당리 성지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잠시 기도를 멈추고 고개 들어 성모님을 바라보면 여전히 순례자를 향해 팔 벌려 계신다. 다시금 기도에 전념(專念)할 힘을 얻는다. 먼저 다녀간 순례자들의 손길을 머금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커다란 묵주알에 두 손을 얹는다.
※수원교구 요당리성지-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 031-353-9725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