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WYD)’는 지구촌 가톨릭 청년들의 대잔치다. 지난 8월 열린 리스본 WYD에는 무려 143개국 100만여 명이 참여해 신앙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때 가장 뜻깊은 감동과 추억을 선물 받은 이들이 있으니, 다름 아닌 한국 청년들이다. 서울이 다음 WYD 개최지로 선정된 까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몸소 전한 이 가슴 벅찬 낭보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환호하던 한국 청년들.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특별한 사연을 가진 ‘나는 가톨릭 청년이다’의 이번 주인공이다. 자유와 희망을 찾아 남한에 온 지 11년 차인 북한이탈주민 이은별(스텔라, 24)씨다.
탈북하고 가톨릭을 알기까지
왕 감자로 유명한 양강도 대홍단군에서 나고 자란 은별씨는 12살 때 어머니와 두만강을 건넜다. 세 살짜리 여동생은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는 한 조선족 남성과 재혼했고, 은별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학교란 곳에 갔다. 북한에선 선생들이 토끼가죽이나 땔감 등을 가져오라고 닦달하고, 안 내면 두들겨 패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난생처음 공부라는 걸 해보니 그동안 몰랐던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학생 수가 적다는 이유로 학교가 갑자기 문을 닫아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새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한국에 가면 국적도 얻고 배우고 싶은 건 다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행을 결심한 14살 은별씨는 어머니에게 선포했다. ‘나 한국 가서 더 배우고 싶어. 엄마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모녀는 중국을 떠나 라오스로 가서 메콩 강을 건너 두 달 만에 겨우 태국에 왔다. 그리고 현지 경찰에 잡혀 한국대사관으로 인도됐다. 그렇게 처음 비행기를 타고 마침내 한국에 도착한 은별씨는 곧장 국정원으로 가서 두 달간 조사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 종교인들이 찾아오는 날이 있었어요. 그때 한 친구가 저보고 ‘같이 예쁜 공주 퍼즐을 맞추자’고 해서 갔는데, 남승원(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님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님들이 계셨어요. 저를 따스하게 맞아주시고 그룹홈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셨죠. 그때부터 무조건 가톨릭 쉼터에 가기로 다짐했어요. 한국에 와 있는 새 아빠랑 살기 싫었거든요.”
가톨릭 신자가 되고 냉담하기까지
하나원에서 3개월간의 정착 교육 일정을 마치고, 은별씨는 모 수녀회가 운영하는 그룹홈에 입소했다. 수녀들은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은별씨를 보살폈다. 세례명 스텔라도 가장 살뜰히 챙겨준 수녀가 지어줬다. 이름과도 통하는 데다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 은별씨 마음에 쏙 들었다. 신앙심은 별개의 문제였다. 수녀들에겐 고마웠지만, 하느님께 고맙다는 것은 실감이 안 났다. 종교는 자유라는데, 공부 따라가기도 벅찬 와중에 주일마다 억지로 미사에 가는 것도 불만이었다. 훈육 방식 등의 차이로 수녀님과 갈등을 겪은 것도 큰 스트레스를 줬다.
마침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외할머니가 북한에 어린 여동생을 혼자 놔두고 소식이 끊긴 자신과 어머니를 찾으러 탈북한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난생처음 혼절했다 깨어난 은별씨는 절망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데…. 하느님은 안 계신 게 분명해!” 1년 뒤 동생도 무사히 탈북에 성공해 눈물의 상봉을 했지만, 한번 시작한 냉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차갑게 굳었던 은별씨 가슴 속에선 신앙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계기가 생겼다. 바로 리스본 WYD였다.
탈북 청년의 신앙과 인생을 바꾼 WYD
“WYD는 제 인생과 신앙에 있어 정말 ‘전환점’이자 엄청난 자양분이었어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포르투갈에서의 나날을 회상하는 은별씨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하느님 자비 복음의 종 선교회와 함께 리스본 WYD에 다녀왔다. 첫 행선지는 교구 대회가 열린 코임브라였다. 은별씨는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는 싱글맘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세 식구가 보여준 마음의 여유와 따스함에 그는 크게 감동했다. 남을 위해 베풀고 싶단 마음마저 생겼다.
“어떻게 홀로 힘겹게 자녀를 기르는 데도 집을 기꺼이 개방해주지? 같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생판 남인 저를 이렇게 가족처럼 환대해 줄 수 있을까?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아이들도 의젓하게 자기 방을 내주고, 제가 공항에서 잃어버린 짐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해 줬어요. 이때 기억이 너무 행복하게 남아서 저도 2027년 서울 WYD에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탈북 청년 집에서 홈스테이하는 경험은 외국 신자들에게 이색적이지 않을까요?”
포르투갈에서 배운 형제애와 용서
리스본에서 열린 본대회에서도 은별씨는 뜻깊은 경험을 했다. 주교 교리교육 시간이었다. 대전교구 한정현 주교가 한 말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주교님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리라고 하신 다음 물으시는 거예요. 하느님이 저를 어떻게 여기시겠느냐고요. 당연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죠. 그러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느님은 제가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으시냐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사실 제가 당시 무척이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하느님에겐 그 사람도 저처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인 거잖아요.” 마침 그날 복음 말씀도 돌아온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은별씨는 자신이 복음 속 큰아들 같다고 느꼈다.
신기한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교리를 듣기 전만 해도 마음이 예민하고 불안한 탓에 위가 꼬일 듯이 아팠다. 성당에 들어가니 신기하게도 마음 편해지며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때 머릿속에서 한 마디가 마법처럼 떠올랐다. “맞아. 나, 이래서 하느님 믿었구나.”
2027 서울 WYD에 대한 걱정
WYD가 보여준 또 다른 마법이 있었으니, 언어가 서로 다른 세계 청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영어에는 젬병이었던 은별씨였는데, 희한하게도 듣고 말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일본·중국 청년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오랜 친구처럼 서로 편하게 웃고 떠들며 즐겁게 지냈다. 어떠한 편견과 차별도 없이 모두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나가 된 시간. 은별씨는 “이것 역시 기적”이라고 했다. 그 기적이 2027년 서울에서 재현되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가톨릭 신자가 적고 딱딱한 도시 분위기의 한국에서 2027 서울 WYD에 참여한 청년들을 환대해줄지 좀 걱정이긴 해요. 노래를 크게 불러서 소음 신고가 들어오거나, 교통 통제 때문에 시민들이 짜증을 내진 않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부디 그들이 반갑게 인사하면 똑같이 ‘안녕’하며 손 흔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