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탈핵평화순례단, 핵발전소 사고 난 후쿠시마현을 가다 <중>
박현동 아빠스를 비롯한 한일탈핵평화순례단이 반성보다는 부흥을 홍보하는 전승관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희한한 풍경이었다. 기차역과 관청은 새것처럼 말끔했지만, 집들은 하나같이 폭격을 맞은 듯 반파된 상태였다. 안에는 전에 살던 사람들이 썼던 물건들이 먼지 쌓인 채 뒤섞여 나뒹굴었다. 정원 역시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 사람 키만 한 잡초가 무성했다. 곳곳이 깊이 팬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엉망이 된 채로 방치된 식당 건물을 맞닥뜨렸다.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 일본어로 ‘어서 오세요’) 유리문에 미처 지워지지 않은 글자가 처량함을 더했다. 유령도시 같은 스산함마저 주고 있는 이 마을은 일본 후쿠시마현 후타바정.(町, 우리나라로 읍에 해당) 바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핵) 발전소 5~6호기가 자리한 곳이다. 박현동(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장) 아빠스를 비롯한 제9회 한일탈핵평화순례단은 센다이교구 초청으로 18일 후쿠시마를 찾았다.
2011년 쓰나미로 대량의 방사성 물질 누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9.0의 강진이 혼슈 북부 도호쿠(東北) 지방 태평양 앞바다에서 발생했다. 진도 6~7의 심한 흔들림과 함께 높이 10m 이상, 최대 40m에 달하는 초대형 지진해일(쓰나미)이 해안가를 덮쳤다. 순식간에 건물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도 쓰나미에 휩쓸려 전원 공급이 중단되고 말았다. 원자로를 냉각할 수 없게 되자 그 안에 있던 핵연료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인류 최악의 핵사고였다. 핵발전소와 가까운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게 됐고, 많은 주민이 고향을 떠나 전국으로 흩어졌다. 후쿠시마에서도 16만 4000여 명이 피란을 떠났다. 10년 뒤인 현재는 12만 7000여 명이 돌아온 상태다. 그러나 후타바정으로 돌아온 주민은 극히 드물다. 2021년까지 일본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 수 없는 정이었기 때문이리라. 쓰나미와 지진의 상처가 생생한 후타바정 곳곳에는 지금도 방사능 오염토를 담은 검은 포대가 잔뜩 쌓여 있다. 도로에는 오염물을 가득 실은 트럭이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기차역과 관청까지 새로 단장하며 후타바정을 ‘부흥’의 증표로 삼고자 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불과 4㎞ 떨어진 곳에 있는 ‘동일본 대지진·원자력 재해 전승관’.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개장한 이곳에서도 일본 정부의 의중이 묻어났다. 재해 당시 현장 모습과 피해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핵심은 역시 ‘부흥’이었다. 전시물은 10년 간격을 둔 비교 사진 등 그간 후쿠시마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회복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1970년대 지어져 일본 경제 성장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도 조명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밖에서 더 뛰놀게 하라는 권고도 있었다. 하지만 핵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지, 왜 이러한 참사가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과 반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후타바정에 있던 처참한 건물들과 대조적으로 으리으리하고 번듯한 전승관. 이곳에서 소풍 온 듯 즐겁게 둘러보는 관람객들을 보며 순례단은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저들은 무엇을 느끼고 배워갈까. 과연 우리나라는 다를까.’
50년간 홀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해온 시가 가스아키씨가 2011년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방치된 집들을 가리키고 있다.
핵발전소 보상금으로 가난한 주민 회유
후쿠시마에 잘 꾸며진 ‘좋은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하고 참된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지역에서 꿋꿋하게 탈핵 운동을 펼쳐온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다. 대를 이어 후쿠시마에서 조개잡이 어부로 살아온 70대 노인 시가 가쓰아키씨. 그는 무려 50년 동안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며 외롭게 투쟁해왔다. 도쿄대 원자력공학과 1기 출신으로 ‘탈핵 운동의 대부’ 격인 안자이 이쿠로(리쓰메이칸대) 명예교수의 강연을 들은 게 계기였단다.
시가씨는 “핵발전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 생긴다”며 “후쿠시마가 있는 도호쿠 지역은 1000년 전까지 일본 원주민인 에미시들이 살던 곳으로 식민지라고 할 정도로 착취되고 소외된 지역”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핵발전소가 생긴 것도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집 한 채 살 정도인 핵발전소 보상금을 가난한 후쿠시마 주민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며 “그래서 자신이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했을 때, 주민들에게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전했다.
“어업 협동조합에서 제명되고, ‘아무도 너를 안 도와줄 것이다’란 말까지 들었죠. 어업이란 건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말이죠.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후쿠시마 핵사고가 난 이후 저는 지금 당당해요. 지금껏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제 신념이 틀리지 않았단 뜻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어민들은 자신들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삶을 부정하는 것 같아 어려운 게 아닐까요. 이제 우리 국민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미디어가 올바른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시가씨가 전하는 진심 어린 말에 순례단은 경청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그는 후쿠시마 오염수에 관해서도 “지상 보관해야 한다”며 “어민들도 해양 방류를 원하지 않지만, 정부가 많은 보상을 주기 때문에 목소리를 쉽게 못 낸다”고 지적했다. “참 안타깝고 복잡하다”고 하는 그의 눈빛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한때 집채만 한 쓰나미가 일어났지만, 지금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푸른 태평양을 보며 시가씨가 말했다. “핵발전소의 피해라고 하는 것은 사고가 난 이후에 시작하는 게 아니라 건설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천장과 벽이 무너져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우케도초등학교.
지진 재해 유적 나미에정립 우케도초등학교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북쪽으로 약 5.7㎞ 떨어진 나미에정. 이곳에 있는 우케도초등학교는 15m 쓰나미가 덮쳐 건물 2층까지 물이 찼는데도 기적적으로 희생자가 1명도 없었다. 교장의 빠른 대처로 학생 82명과 교사들이 1.5㎞ 거리의 오히라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의 판단과 자질은 많은 생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핵발전으로 회귀하는 한국과 일본 위정자들의 판단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시민들은 잘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 초등학교에는 수도꼭지가 휘고, 천장과 벽이 무너져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등 쓰나미가 남긴 상흔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