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사제가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폐결핵을 앓으면서 일생을 각종 병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의정부교구 상장례학교’에 몸담으며 죽음을 앞둔 타인의 마지막 날에 동행하며 성사를 베풀었다. 선종하기 두 달 전부터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자신의 죽음을 감당했던 고 양종인(치릴로, 1972∼2012) 신부다. 그는「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을 남겼다. 그가 상장례학교에서 신자들에게 강의한 삶과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강의록은 김훈(아우구스티노) 소설가의 소설 「저만치 혼자서」의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깊은 울림을 안겼다. 위령 성월, 마흔의 짧은 생을 살다간 한 사제의 삶과 그가 남긴 생명의 가치와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다.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으로
“사제생활 이제 겨우 10년을 넘긴 젊은 사제의 죽음이기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과제들을 생각하며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신부님을 보내드려야 할 것입니다.”
2012년 10월 25일 의정부주교좌성당. 양 신부의 장례 미사를 주례한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양 신부님은 평소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제였다”며 “양 신부님의 순수함은 사제로서 지닌 열정과 검소함에서 잘 드러났다”고 회고했다.
1972년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양 신부는 고등학생 시절 폐결핵에 걸려 3년 내내 독한 약으로 버텼다. 약한 몸이었지만 사제의 삶을 꿈꾸며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갔다. 2000년 서울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양 신부는 서울의 본당에서 보좌로 사목하다가 2004년 신설된 의정부교구로 이적했다. 당시 교구 상장례학교 사무총장으로 상장례학교 설립을 도왔으며 2011년에는 상장례학교장으로 봉사했다.
그의 누나(양선희 루치아)는 병약한 젊은 신부가 ‘죽음’의 일에 너무 매달리는 것 같아 “왜 그 일만 하느냐”고 물었다. 동생 신부는 “지상에서 죽음의 세계로 가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건 사제가 하는 일”이라고 덤덤하게 답했다.
양 신부는 자료를 찾고 공부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사제 생활 12년 동안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뿐 아니라, 「예비신자 교리교안」, 「성사론 강의록」등 세 권의 강의록과 영성사를 다룬 4권의 책자를 남겼다. 직접 쓴 교리서와 자료집을 제본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양 신부는 검소하고 알뜰했다. 구형 폴더폰과 교통카드를 넣은 배낭을 메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100㎞가 넘는 수녀원에 가서 주일 미사 드리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병고마저도 자신의 일상처럼 순응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을 호소하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는 선종 당일에도 부산에 일정이 있어 지팡이를 짚고 경기도 양주시의 사제관을 나섰지만 몹시 아파 보이는 양 신부를 동료 신부들이 강제로 병원에 데려갔다. 온몸에 암세포와 염증이 퍼져 있었지만, 가족과 동료 사제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병원에 들어간 지 12시간 만에 눈을 감았다. 마흔 살이 되던 해였다.
행복 추구의 논리로 희생되는 생명
“병고에 시달리던 이 젊은 신부가 죽음이 임박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성무(聖務)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감당해나가던 마지막 날들을 보여주면서, 삶과 죽음을 장난처럼 가볍게 여겨서 재미없는 놀이를 집어치우듯이 자살하는 세태를 향해서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김훈 소설가)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은 죽음과 관련된 생의 모든 장면을 다뤘다. 양 신부는 “이 강의록은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며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품위를 거스르는 죽음의 왜곡된 모습을 바라보고, 죽음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품위를 지켜나가는 길을 살펴보려는 의도로 작성했다”고 밝힌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역시 행복을 추구한다. 이런 현실에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차라리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인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역시도 죽는 순간까지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강의록 중에서)
양 신부는 자살에 대한 환상과 오해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왜 나만 이처럼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가?’, ‘자살하면 현재의 고통에서 단숨에 벗어날 수 있다’, ‘이 세상과 사회의 환경이 나를 자살하게 만든다’, ‘자살하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할 수 있다’ 등이다. 양 신부는 살기 싫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명약은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이라고 결론 내리는 세태를 꼬집는다. 그러나 이는 죽음이 삶과의 결별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죽음은 삶의 완성이자 연장이라고 강조한다.
양 신부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가?’라고 전한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생명윤리를 근간으로 「의학윤리 지침서」, 「가톨릭교회 교리서」 등을 참고해 그리스도교가 바라보는 죽음을 시작으로 자살과 안락사, 낙태 등 논쟁적 죽음의 현상을 교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 심리적 요인까지 살핀다.
양 신부는 결국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이 단순히 회피해야만 하는 무의미한 것인가를 일관되게 되묻는다.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편안하게 죽는 것을 선택하는 안락사, 나약한 태아의 생명을 박탈하는 낙태 행위에도 결국은 행복 추구의 논리가 적용됨을 설명한다.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은 2021년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독서일가)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돼 세상의 빛을 봤다. 양 신부의 아버지 양승규(시몬, 전 서울대 법대 교수)씨가 출판을 제안했고, 누나 양선희(루치아, 전 중앙일보 대기자)씨가 책으로 엮어냈다.
양선희씨는 책 서문 ‘치릴로 신부의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을 내며」’에서 “그는 다만 무던하게 공부하고 묵상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상을 부지런히 살았다”면서 “그의 이런 우직한 생활방식이 그렇게 짧은 일생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늘 그가 아픈 사람이라는 걸 잊게 할 정도로 무덤덤하고 평화로운 표정을 유지하도록 한 비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썼다. 그는 (출간 당시) 코로나19로 자살 충동이 늘고 있고 치릴로 신부가 꼭 살리고 싶은 누군가의 생명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출판을 서둘렀다고 밝혔다.
김훈 소설가는 서문 ‘누구에게나 삶은 가볍지 않다’에 “남의 죽음에 간여해서 죽음의 인도자가 되는 것이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일상의 일이었고, 그는 이 일상의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인도하고 있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고인의 모습을 들으면서 나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을 인간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건너가서 죽음의 저편에 신생을 건설하는 젊은 사제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