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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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27) 일상 안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하) 시노달리타스는 평화가 아니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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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거 미국 민간인들이 국제평화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 들어와 의료, 교육, 농업 등의 분야에서 애쓴 적이 있었다. 이분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십 수 년간 한국을 위해 살다가 본국으로 되돌아갔는데, 얼마 전 한국 정부에서 이들을 초청하는 행사에 나 역시 초대되어 갔다. 당시 원탁에 앉아 식사하는 중, 누군가 대뜸 신부 옷을 입은 나에게 미국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한국은 어떠냐고 물었다. 참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사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다. 올해 우리 연구소에 방문했던 체코의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나 미국의 스티브 베반스 신부님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과 미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시노달리타스 교회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는 예수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시노드 교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 교회의 영적 체질을 개선하여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한 모든 개혁과 쇄신에는 자기파괴의 과정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극도의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 가치관에 의문을 일으키며, 이제껏 익숙하게 생활해 왔고 때로는 누려왔던 권리와 관행의 변화가 요구되었을 때, 반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노드 교회를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전쟁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역시 인간 세상 안에 있기에 새로운 발전과 혁신을 도모하려는 사람과 익숙한 과거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 사이의 줄다리기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변증법적 투쟁은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이 아니다

개혁이든 쇄신이든 그것을 추진하는 그룹이 있으면,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타협도 필요하다. 이는 교회 안 공의회의 전후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근대의 개혁 공의회였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전에 자연발생적인 교회쇄신 운동과 비전을 공유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물론 그 반대 세력들도 있었다. 20세기 중반에는 이러한 그룹 너머에 트리엔트공의회로 각인된 교회에 더 익숙한 사람들 또한 훨씬 많았다. 그래서 공의회 회기 중에도 공의회를 방해하는 복고주의자들도 있었고, 공의회가 끝나고도 그 가르침이 모든 곳에 잘 정착되지도 못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은 복고주의에서 발생하는 아이디어와 행동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의회가 뿌리를 내리는 데 100년이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 40년이 남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공의회의 연장선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효율적이고 심도있는 교회쇄신을 추구하는 시노달리타스 교회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시노달리타스 교회쇄신을 위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으며 이 전쟁 같은 타협을 계속해야만 하는 걸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현대인의 타협에 대한 생각은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에 준거한다. 변증법은 ‘진리’와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고, 부딪치고, 좌절하면서 세상과 사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지식이 수정되고 더 보완됨으로써 내가 진리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는 논리다. 진리를 알거나 공동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릴 만큼 강한 결기와 투쟁이 필요한 것이라는 게 변증법의 원리다. 진리에 대항한 오류, 발전을 가로막는 구태의 모든 세력과의 치열한 대립과 번성기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공동체는 더 큰 도덕적 이상을 성취하고 문명의 발전을 이룬다. 더불어 개인 차원에서는 진리를 획득하고,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근대인은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와 규율에 익숙하다. 우리가 이런 논리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때, 나와 타인의 관계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일 수도 있고 발전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나와 다른 극단에 선 타자와의 피 터지는 경쟁을 통해 무엇인가 더 좋은 몫을 얻는 것이 선이고 진보라고 믿는다. 복고주의자의 관점에서도 변증법적 투쟁의 과정은 존재한다. 교회의 전통과 관행을 바꾸려고 하는 급진적 개혁주의자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교회의 가치를 지키면서 신앙의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상대와의 치열한 생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것과 시노달리타스 교회의 길은 완전히 다르다.


성령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사이’를 기다리는 것이 시노달리타스의 방식

내가 생각하는 진리를 획득하고, 진보를 이루기 위해 타인과 투쟁해서 이기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찾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 경청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즉 시노드 교회의 삶은 특정한 생각과 실천으로 타자를 굴복시키며 얻어내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나와 너의 말과 생각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를 사유하고, 그 사이에 함께 머물러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이다. 이 길은 치열한 변증법적 과정에서 새로운 진보를 모색하거나 전통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나와 타자의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여 진리가 밝게 드러나고, 새로운 길을 내도록 함께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험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몇 년 전 독일 쾰른대교구가 여러 가지 문제에 휩싸였다. 내용인즉, 교구에 성·재정·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교구장의 사임을 원했다. 여기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생각을 밝히셨다. 교황은 즉시 교구장을 해임하지 않고 6개월을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이 거칠고 탁하면 명확하게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압력 단체가 많고,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는 이를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교황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교구장 해임 공문을 당신의 책상 서랍에 넣어 둔 후,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셨다. 교황은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는 성령의 뜻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결정은 교황이 아니라, 결정권자와 관련된 타자들 사이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나와 너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의 뿌리는 인내이며, 타인을 인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자기를 인내하는 것이 희망이며, 그 모든 희망으로 하느님을 인내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길인 것이다.


최영균 시몬 신부(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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