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04차례 해외 사목방문에 나서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했으며,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제삼천년기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종교간 대화로 전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삶을 알아본다.
■ 연극에 몰두했던 문학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세속명은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zef Wojtyla)로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크라쿠프 인근의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바도비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카롤은 크라쿠프에 있는 야기엘론스키대학교에 입학해 문학과 연극을 전공했다. 1939년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고 대학을 폐쇄하자 카롤은 채석장과 솔베이 화학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독일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에밀리아는 카롤이 9살이 되는 해, 의사였던 형 에드문트는 1932년, 누나 엘가는 카롤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마저 1941년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에 고아가 된 카롤은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며 연극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성소에 눈을 떴다. 전쟁의 상처와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연극에 대한 애착을 접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카롤은 1942년 크라쿠프대교구가 비밀리에 운영하던 신학교에 입학했다.
카롤은 1946년 11월 1일 크라쿠프대교구장 아담 사피에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로마에서 유학했다.
1948년에는 로마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학’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 폴란드로 돌아온 카롤은 크라쿠프에서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면서 대학생 사목을 담당했다. 또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카롤은 크라쿠프 신학교와 루블린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과 사회윤리를 가르쳤다.
■ 전 세계 누비며 복음 전해
1958년 비오 12세 교황은 38살의 카롤을 크라쿠프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이어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크라쿠프대교구장에 임명했다. 1967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됐다. 크라쿠프대교구장으로서 카롤은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에 저항하면서 교회의 합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신앙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외에도 카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으로 네 차례 회기에 참석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사목헌장」 초안을 작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공의회 이후 열린 여러 차례의 세계주교시노드에도 참석했고, 1974년 열린 시노드에서는 책임보고관 역할을 맡기도 했다. 카롤은 세계성체대회 참석, 학술 강연 등을 위해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폴란드인 공동체를 순방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교회 안에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 선종 후 선출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급작스럽게 선종하자, 추기경들은 58세의 비교적 젊은 카롤을 교황으로 선출했다. 456년 만에 선출된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었다. 전임자의 이름을 이어 요한 바오로 2세를 교황명으로 정한 그는 선교 열정으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배려하고 온 인류에 자비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9년 1월 멕시코 사목방문을 시작으로 104차례 해외 사목방문에 나섰는데, 그가 여행한 거리만 200만㎞에 이른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어느 지역을 방문하던지 도착 즉시 무릎을 꿇어 땅에 입 맞췄다. 성 요한 비안네 신부를 본받은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유머 감각으로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160회 이상의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1760만 명의 순례자들을 만났다. 2000년 대희년에만 800만 명이 로마를 찾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했다.
■ 청년 사랑하고 대화 강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특히 청년들을 각별히 사랑했다. 교황은 청년들의 신앙 활성화를 위해 1986년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WYD)를 창설했다. 재임 기간 열린 19차례의 WYD에서 교황은 전 세계에서 온 수백만 명 청년들을 불러 모았다. 동시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4년 ‘세계가정대회’(World Meeting of Families)를 창설해 가정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배려를 강조했다.
그는 유다교를 비롯해 타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에도 주력했다. 아시시에서 열리는 세계평화기도회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작했다. 또 새천년기를 맞아 교서 「제삼천년기」를 통해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고 대희년의 의미를 전 세계 신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주력했다.
또 교황은 우리 시대 신자들에게 성덕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모범이 되는 신앙인을 시복시성하는 데에도 힘썼다. 147번의 시복으로 1338위를 시복했으며, 51번의 시성식에서 482위를 시성했다. 1984년에는 교황 중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해 그해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교회 200주년 기념미사와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거행했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밖에서 열린 시성식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년에 초인적인 의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을 하루 앞둔 2005년 4월 2일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종했다. 40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장례미사에서는 ‘즉시 시성을!’(Santo Subito)라는 현수막이 등장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작업은 선종 즉시 시작됐다. 교회의 시복시성 절차는 선종 후 5년이 지나야 가능했지만,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유예기간을 면제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11년 5월 1일 시복됐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성 요한 23세 교황과 함께 시성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축일은 10월 22일로, 1978년 교황으로 즉위한 날이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