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포교성성과 국무원은 한국 교회의 보호와 성장을 위해 노력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합법적인 나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속해서 교황청의 지지와 관심을 요청했다.”(권영명 신부)
“패트릭 번 주교의 대표적인 외교 활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원한 일이었다.”(양인성 박사)
“주한 교황대사관은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바티칸에 보고했고, 포교성성은 이를 기초로 관심과 원조에 더 적극적이었다.”(김동수 신부)
“한국 정부와 교황청은 항상 애정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 나갔다.”(마리아 보즈가 로마책임연구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올해 한국과 교황청 수교 60주년을 맞아 지난 5년간 진행해온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을 마무리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11월 2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교황청의 역할을 다루고, 특히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의 외교 활동을 집중 조명했다. 발제자들은 발굴 자료들이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동시에 교황청 소장 자료들이 계속 연구되길 기대했다.
▧ 대한민국에 대한 바티칸의 관심과 지지-교황청 역사문서고 사료들 중심으로 / 권영명(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신부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패트릭 제임스 번(James Patrick byrne, 1888∼1950) 주교는 1947년 7월 주한 교황순찰사로 임명됐다. 일제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관리하게 됐다. 공식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그 시기, 1947년 10월 9일 주한 교황순찰사 번 주교가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 교회를 위해 파견됐지만, 한국의 지도자들은 교황청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하나의 표징으로 받아들였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이러한 결과를 끌어낸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는 비오 12세 교황을 알현했다. 그는 한국 신자들의 서한을 전하며 주한 교황순찰사를 교황사절로 승격, 새로운 한국인 주교 임명, 가톨릭 고등학교 증설, 교황청과 대한민국 사이의 수교를 요청했다.
반공산주의라는 공동 전선을 펼친 바티칸과 대한민국의 정부. 한국 사회 안에서 천주교의 명예와 위상을 높이기 위해, 미래 천주교 신자들인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직무를 다했던 주한 교황순찰사, 교황사절, 교황사절 서리가 있었다. 세계 평화와 한국 교회의 보호와 성장을 위해 노력했던 교황청 포교성성과 국무원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합법적인 나라로 인정받고,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도록 교황청의 지지와 관심을 요청한 대한민국 정부가 있었다.
▧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의 외교 및 교회 활동 /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인하대 사학과 강사) 박사
번 주교는 교황공사나 교황대사와 같은 ‘공식’ 외교관이 아니었다. 교황사절로서 그의 주된 임무는 한국 교회의 상황을 교황청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와 사회는 그의 부임을 높게 평가했고, 정치ㆍ외교적 역할을 기대했다. 번 주교의 대표적 외교 활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원한 일이었다. 캐나다 외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유엔총회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의 정부’로 인정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번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회 활동에도 힘썼다. 당시 한국 교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외국인 선교회의 선교지 문제가 그중 하나였다. 번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노기남 주교의 의견을 교황청에 보고했다. 그 결과 1948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대전지목구를 새 선교지로 위임받았다. 1949년 메리놀수녀회가 부산에서 의료사업으로 활동을 재개하도록 주선자 역할도 했다. 번 주교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북한 정권을 비판하고 구금된 성직ㆍ수도자의 석방을 위해 북한 정권과의 교섭도 제안했다.
▧ 주한 교황대사관 1953년∼1957년 사료에 대한 개요 / 김동수(의정부교구 사법대리 겸 사무처장)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토마스 퀸란(Thomas Quinlan, 1896∼1970) 주교는 1934년 6월 한국에 입국, 1940년 제2대 춘천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들과 수감됐다. 전쟁 후 춘천지목구장으로 복귀했지만,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체포돼 교황사절 번 주교, 선교사들과 북한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1953년 4월 석방돼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1953년 10월 교황사절 서리 겸 춘천지목구장으로 다시 임명돼 이듬해 4월 한국에 다시 왔다. 1955년 주교로 수품, 춘천교구 최초의 주교가 됐다.
퀸란 주교의 기록물은 그가 교황사절 서리로 있었던 1953~1957년의 기록물이다. 1949∼1950년 기록물은 당시 한국 상황과 전쟁의 이유로 소실되거나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한 교황대사관은 1994년에 기록물들을 사도좌문서고로 이관했으며, 퀸란 주교의 기록물은 문서기록대장 없이 25개의 서류봉투에 8개의 상자로 보관 중이었다. 한국전쟁 후의 기록물이기에 당시 한국 교회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퀸란 주교의 기록물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한국 교회를 사랑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당시 한국 교회는 해외 재정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교황사절이 각 대목구와 지목구 재정과 행정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바티칸 도서관과 복음화부 역사문서고의 자료 조사(2019∼2023년) / 마리아 보즈가 연구원(로마 책임연구원)
연구의 목적은 한국과 관계되는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목록화하고 해당 문서들의 내용을 조사해 한국과 교황청의 관계사와 연관된 자료를 발굴하는 것이다. 또 이를 체계화해 학문적 연구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티칸 도서관 자료 조사는 2019년 3월 시작돼 2023년 6월까지 이뤄졌다. 포교성성, 곧 지금의 복음화부 역사문서고에 보관된 자료 조사는 2021년 12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진행됐다.
바티칸 도서관에서의 작업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이뤄졌다. 한국에서 온 모든 문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한국 문화와 관련한 필사본, 인쇄본, 사진과 동전들, 정기간행물을 분류했다. 자료의 출처를 검증, 내용을 기술하고 분류해 목록화했다. 동시에 동양에 속하는 모든 지역 문서들을 디지털화하고 복원했다. 바티칸 도서관에서 처음 이뤄진 작업이었다.
복음화부 역사문서고에서는 1939~1958년 비오 12세 교황 재위 당시 교황청과 한국 사이의 관계 관련 문서에 대한 조사가 처음 이뤄졌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전후 시기를 포함한다. 1949년 교황청은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고 서울에 교황사절 공관을 세웠으며, 패트릭 번 주교를 첫 교황사절로 임명했다. 사도좌의 외교관이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국 정부의 정치ㆍ경제적 어려움에도 교황청은 진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 나갔다. 교황청은 북한과 일치와 화해의 길을 걷고자 하는 한국인의 갈망을 늘 지지해왔다. 교황청의 다른 문서고 소장 자료들이 계속 연구되기를 희망한다. 선교, 역사, 민족학,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을 위해 교황청이 해온 복음화 사명과 연결된 사건들의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사료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