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교황청 수교 60주년 기획- 주한 교황대사관 발자취
1963년 발행된 「한국 가톨릭 어제와 오늘」에 실린 주한 교황사절관 정문 사진(왼쪽 사진). 2년 뒤인 1965년 교황사절관을 헐고 그 자리에 현 주한 교황대사관(당시 교황공사관)을 세웠다.
1947년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 첫 파견
서울교구장이던 노기남 대주교 사절관 물색
1년만에 궁정동에 일본인 저택·토지 매입
훗날 일본인 찾아와 되사고 싶다 문의도
조선시대 세도가문 장동 김씨 터 잡은 명당
속됨 없는 집 ‘무속헌’이라 불린 기록 남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자하문로26길 19). 청와대 본관에서 불과 약 200m 떨어진 이곳엔 잔디 정원과 함께 2층짜리 단아한 흰색 건물이 한 채 자리해 있다. 바로 주한 교황대사관, 교황이 파견한 외교사절인 교황대사가 상주하는 공관으로, 한국과 교황청을 잇는 상징적인 자리다. 앞서 교황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숙소로도 쓰인 장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과 198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이곳에 머물렀다.
교황대사관은 과거 ‘권력의 중심’이었던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주한 대사관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코앞에서 벌어졌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공작원이 침투했던 곳,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안가(안전가옥)에서 시해된 역사의 현장과도 지척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안가를 헐어낸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 대사관 바로 남쪽에 있는 ‘무궁화동산’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교황대사관은 도대체 어떻게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주한 대사관이 됐을까? 대한민국-교황청 수교 60주년을 맞아 기록을 토대로 그 발자취를 되짚어봤다.
현 주한 교황대사관이 들어서기전 교황사절관 모습(왼쪽 사진). 나무로 둘러싸인 단층 건물에 ‘교황 삼층관’이 그려진 깃발(원 안)이 걸린 모습이 이채롭다.
1948년 궁정동 일본인 저택 매입
대한민국과 교황청은 1963년 12월 11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교황청 외교사절이 한국에 주재하기 시작한 때는 한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이었다. 비오 12세 교황이 한국에 고유한 첫 교황사절을 파견한 것이었다. 초대 평양지목구장과 초대 일본 교토지목구장을 지낸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 패트릭 J. 번(1888~1950) 주교였다.
경성(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당시 주교, 1902~1984)는 번 주교가 머물 사절관을 구하느라 애를 썼다. 쓸만한 건물들은 전부 가격이 턱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그러다 노 대주교는 1년 만에 마침내 궁정동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저택과 토지를 매입하게 됐다. 기록을 보면, 개인 소유였던 해당 용지가 1948년 ‘재단법인 경성부 천주교회 유지재단’ 소유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70년 넘게 이어질 교황대사들의 궁정동 생활이 막을 연 것이다. 노 대주교는 1969년 펴낸 「나의 회상록 : 병인 교난에 꽃피는 비화」에서 사절관을 구할 당시 정황을 이렇게 전한다.
“방 주교(번 주교)님께서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1947년 10월 9일 서울에 부임하셨지만, 서울에는 사절관이 없어 이듬해 10월 1일까지 1년간 명동 주교관에서 기거하시며 사절관 후보지와 건물을 물색하시었다. 나도 방 주교님과 함께 서울 시내 수십 처의 건물을 돌아보며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시대에 서울 시내에 거주한 일본인 고관들과 친일파 한국인 부유층에서 상당히 좋은 건물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으나, 모두가 개인 주택들이라 사절관으로는 부적당하고 또 거액의 대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날을 보내며 1년간 여러 곳에 물색 중 1948년 9월에 궁정동에 있는 일본인 모회사 사장 주택이었던 일본식 건물을 사들이고 간단히 수리하여 그해 10월 1일 명동에서 그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현 주한 교황대사관 마당 사진. 정원에선 한때 400여 명이나 되는 각계인사들이 모이는 큰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교황사절관은 기와 얹은 화양식 건물
이처럼 교황사절관은 기와지붕을 얹은 전통 건물이었다. 현재 건물은 수교 이후인 1965년 12월 6일 준공한 것으로, 교황사절관이 아닌 ‘교황공사관’으로 지어졌다.
과거 사절관 모습은 1963년 발행된 「한국 가톨릭 어제와 오늘」(가톨릭코리아사)에서 흑백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나무로 둘러싸인 단층 건물에 ‘교황 삼층관’이 그려진 깃발이 걸린 모습이 이채롭다. 사절관 정문 역시 현재와 다른 모습이다. 검은 철문 가운데 교황관을 사이에 두고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상징하는 금열쇠와 은열쇠가 교차한 모습의 교황 문장이 장식돼 있다. 사절관 건물 높이가 낮은 까닭에 정문 너머로 북악산만이 우뚝 솟아 보인다.
노 대주교는 ‘일본식’ 건물이라고 했지만, 교황사절관은 정확히는 ‘화양식’ 건물로 추정된다. 서양 근대 건축 양식과 일본 전통 양식이 혼합된 양식이다. 이 같이 판단한 근거는 1956년 6월 2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교황사절 서리 토마스 퀸란 주교 인터뷰 기사다. “화양식으로 꾸며진 이 건물”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절관 내부는 어땠을까. 기사에는 “양탄자가 깔린 응접실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나온다. 아울러 기사에 ‘흰 정문’이라고 묘사한 것을 보면, 1956년과 1963년 사이에 검은색 문으로 교체한 모양이다.
교황대사관 터는 세도가문 장동 김씨 살던 곳
사절관의 원래 주인을 놓고 노 대주교는 ‘일본인 모 회사 사장’이라고 썼지만, 현직 교황대사관 직원은 일본인 백작이라고 전한다. 그는 ‘‘해방 이후에 백작의 조카가 찾아와 ‘명당을 잃어 아쉽다’며 ‘다시 사들일 수 없느냐’고 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인의 말처럼 현재 교황대사관 자리는 이미 조선 시대부터 천하 명당으로 통했다. 조선 말기 60년간 세도 정치를 행한 신 안동 김씨, 이른바 장동 김씨가 이 자리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됨이 없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무속헌(無俗軒)이라는 고택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 청음 김상헌이 산 곳이다. 그가 지은 「청음집」에도 무속헌이 등장한다. 한글학회가 1966년 펴낸 「한국지명총람 1: 서울편」은 무속헌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무속헌(無俗軒) : 궁정동 2번지에 있던 중종 때 서윤 김번의 집터. 학조대사가 조카 김번을 위하여 정해 주었는데, 북악의 모양이 목성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기운을 받아서 김씨가 왕성하게 하기 위하여 집을 “이허중(墟中, 태극기 왼쪽 아래 그려진 이괘( ) 모양)으로 지어서 목은 화를 생하고, 화는 금을 다루어 큰 그릇을 만든다는 주역의 이치를 맞추었다 하며,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문곡 김수항 등 인물이 많이 나서 세칭 장동 김씨라 하는데, 이제 교황 사절단 사무실이 되었음.”
현 교황대사관 내부 모습.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
이 무속헌이 언제 철거됐는지, 또 언제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1909년 「대한매일신보」 6월 3일자 신문을 보면 “장동 김씨 기종손(종가의 대를 이을 맏손자) 김정진(金鼎鎭)씨가 무속헌을 전당 잡아 일본인에게 돈을 빌린 후, 일본으로 도주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한매일신보」는 6월 11일자 정정 기사를 내 “사실무근”이라고 알린다. 이후 1912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를 보면, 여전히 소유주가 김정진(金鼎鎭)씨로 나온다. 1927년 토지조사에서 무속헌과 해당 용지는 한국인 소유로 적혀 있다. 이로 추측건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한동안 무속헌과 부지는 장동 김씨 소유로 남아있던 모양이다.
한편, 1933년 발행된 「경성시가도」를 보면, 무속헌 터에 작은 건물 한 동이 남아있다. 어쩌면 무속헌이 이때까지 남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1936년 발행된 「대경성부대관」에서 무속헌 터는 아무 건물도 없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짐작건대 일본인 소유자가 1933년과 1936년 사이 무속헌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철거하고, 그 이후에 교황사절관이 될 저택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속됨이 없는 집’인 ‘무속헌’이란 명칭은 교회와 관계된 공간이 될 것임을 예견한 것은 아닐까.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