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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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3)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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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와 식별

늘 읽고 있다. 읽는 행위는 내 생의 가장 큰 의식(Ritual)이다. 사회를 읽고, 교회를 읽고, 사람을 읽고, 책과 글을 읽는다.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고,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읽는다. 언제부터인지 TV 뉴스를 보지 않는다. 문자와 텍스트 중심의 읽기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책상머리 신학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의 읽기는 책상과 컴퓨터 모니터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읽기는 관심과 질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무엇이 오늘의 사회를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끌고 가는지.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는지. 시간 속의 인간 실존은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대하고 있는지. 읽기는 주목하는 일이다. 사유와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가기도 하고,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는 것에 끌리기도 하고, 의지적 행위와 우연적 행위를 포함하는 사건들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읽기는 시대를 읽는 행위이다. 시대를 읽는다는 것은 뉴스를 읽는 일을 포함한다. 오늘날 뉴스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부분의 미디어는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소식이 상업적 맥락 속에서, 당파적 시선 속에서 처리되고 소비된다. 심각하고 중대한 사건들마저도 호기심과 상품성의 차원에서 취급된다. 이 시대의 뉴스 읽기는 식별을 요청한다.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심, 섬세한 식별, 정직한 성찰을 포함하는 읽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뉴스를 읽는 일은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다. 몇 년 전부터 포털 뉴스를 읽지 않는다. 좋은 언론 사이트를 직접 찾아가서 읽는다. 뉴스에 대한 식별과 선택을 스스로 하겠다는 최소한의 의지 표현이다. 상업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오염되고 왜곡된 뉴스들이 너무 많다. 소심한 일상인인 나는, 식별과 선택을 통한 올바른 뉴스 읽기가 세상을 향한 정직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뉴스를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선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 및 비그리스도인 이웃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보탬이 되는 도구적 선이 될 수 있다.”(제프리 빌브로 「리딩 더 타임스」, Ivp, 2023)


■ 시 읽기를 통한 세상과 사람 읽기

문자주의자인 나는 글을 통해 세상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좋은 글을 통해 세상과 사람에 대해 배우는 즐거움이 크다. 주간 잡지를 통해 읽고 있는, 정치학자 박이대승과 소설가 장정일의 글은 이 시대의 사회적 흐름과 문화적 풍경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한신대 박선화 교수와 미국 교포 정재욱 선생의 글은 일상의 혜안적 성찰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나는 도처의 좋은 글들에서 생을 배운다.

시 읽기를 통해 사람의 내면과 정서를 읽는다. 한 개인적 실존이 자기 생의 여정에서 어떤 인식과 신념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과 자연, 사람과 사물, 사건들을 바라보는지. 어떤 감정과 태도로 운명과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응대하는지. 적어도 나에게는 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성복, 김명인, 허수경, 최승자 등 숱한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과 삶을 읽어왔다. 시를 읽으며 내 생의 시간들을 건너왔다. 시가 없었다면 내 생은 얼마나 밋밋하고 헛헛했을까. 신앙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시를 읽으며 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내 생의 가장 큰 은총과 축복이다.

다른 세대의 삶을 알고 싶어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의도적으로 자주 읽는다. 낯선 감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젊은 여성 시인들의 시집을 일부러 더 읽기도 한다. 하지만 늘 벽에 부딪힌다. 시의 감정과 정서는 논리가 어긋나고 막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생의 신비는 논리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시의 미학적 측면보다는 시가 보여주는 생의 이면과 삶의 역설에 관심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세대 시인들의 시가 이해하기 더 쉽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 쓸 수 없는 시가 있는 반면 나이가 들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시도 있다.”(황유원) 시간의 흐름이 초래하는 삶의 아픔과 슬픔은 삶의 시간을 경험한 시인들만 쓸 수 있는 것인지.


■ 시 구절들로 생각을 구성한다

김소연 시인의 「촉진하는 밤」(문학과지성사)을 읽었다. 김소연 시인은 흐르는 시간이 주는 슬픔과 아픔에 예민한 시인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슬플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촉진하는 밤’)을 믿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역설 또한 안다. 시간 속에서 사람의 얼굴도 변해간다.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분멸’) 느낌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를 생각나게 한다. 늙음과 죽음 앞에서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생은 늘 어긋남의 연속이다. 삶의 여정에서 듣기와 말하기는 자주 빗나간다. “응, 듣고 있어/ 그녀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라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그 사람은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생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밤새 기다리다가 홀연히 아침이 와버”(‘올가미’)리는 일이며, “자신의 목숨만큼만 자기 육체를 이끌고/ 자신의 방식으로 놀다가/ 가는”(‘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일이기도 하다.


■ 이 시대의 사랑과 혁명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다/ 한때 모든 노래는 혁명이었다//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차였다.”(박정대 ‘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 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하지만 구호화된 사랑과 혁명은 끝났다. 사랑은 뒤집혔고, 혁명은 후유증에 가깝고, 우리는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지 않는다.(성기완 ‘블랙에서의 변주’ 참조)

이 짧은 생의 여정에서 우리가 끝끝내 해야 하는 일은 사랑과 혁명이다. 이 시대의 사랑은 읽기와 식별, 이해와 공감이다. 읽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경청하는 일이며 감춰진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엇갈림과 어긋남 속에서도 끝까지 그에게 가 닿는 일이다. 이 시대의 혁명은 신념과 자세와 생활 방식의 쇄신이다. 신앙을 통한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가 우리 시대의 혁명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이 읽기와 변화의 삶을 살고 있는지.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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