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혜화역에서 휠체어를 탄 이들이 줄지어 열차 안으로 들어온다. 승객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대고 어떤 이들은 고함을 친다. “이렇게 피해를 입혀야 되는 거야? 나쁜 ○○들,” “병신이 무슨 벼슬이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대표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동료들을 향해 말한다. “그래, 우리는 병신입니다. 병신이라도 당당한 병신이길 원합니다.” 고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2002)에 나오는 2001년 3월의 시위 현장이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던 장애인이 사망했다. 이때부터 전장연은 ‘죽지 않고 이동하기 위해’ 시위를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2021년 12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지역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 등 장애인이 사람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장애인권리 예산을 늘려 달라고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였다. 출근길 시위는 사상 처음이었다. ‘맞아 죽을 각오로’ 시작한 시위였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시위는 계속됐고 욕설도 장애인들의 가슴팍에 그대로 꽂혔다.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들은 이들에게 ‘비문명인’, ‘사회적 강자’란 딱지를 붙이고 시민을 선동했다. 세상에, 쇠사슬로 몸을 감고 농성하고 지하철 바닥을 온몸으로 기어가야 하는 강자가 어디에 있으며, 버스를 탈 수 없어 한 달에 서너 번 외출할 수밖에 없는 문명이 어디 있는가? 모욕하고 냉대하며,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이 풍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본권리는 구걸하고 애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며,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자는 당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머리 숙이고 애걸하고 비루해야 약자다. 도와줄 때까지 기다리지 왜 이리 나대느냐는 의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이들에게 장애인은 ‘사람’이 아니다. 지하철 시위는 아무도 문제라고 보지 않는 바로 이 문제를 집어내 세상에 던져 놓은 사건이다. 소수자와 약자 앞에 붙는 말이 무엇이라 해도, 이들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무엇보다 ‘사람’이다.
실현해야 하는 바람직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정해 놓으면, 여기에 못 미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생각하고 성찰하고 자의식을 지닌 지성적 존재만을 사람이라 보면, 심각한 발달지체 장애인은 생물학적인 삶만 사는 것일 뿐, 자신의 이야기와 역사를 지닌 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존엄은 인간 특성의 실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경이’인 인간 존재에서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은 우리를 한 발자국 더 데리고 들어간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사람이 되신 사건이 강생이다. 강생은 자신 바깥으로 나가는 폭발적인 사랑이어서, 인간의 편협한 사랑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균열이다. 우리 삶을 전혀 다르게 보게 하고 우리의 사랑을 확장시키는 이 사건으로, 하느님과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 하느님과의 공속이 존엄의 근거이다.
그리스도인 누구나 이 세상에서 정의를 가꿔나가야 하는 소명이 있지만, 특별히 장애인은 ‘사람됨의 특권적인 증거’를 보여주며 그 소명을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들은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이들이며, 권력과 폭력, 포악함에 더 이상 지배받지 않고 연대와 포용과 사랑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는 이들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비장애인들에게 윤리적 교훈을 주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모욕하고 적대하며,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해 하고, 자만심으로 동정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냐고 물어보려는 것이다. 불의와 차별을 마치 정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 죄다. 이럴 때,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박상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