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하는 신자는 부조리한 것을 꿈꾸는 셈입니다.”
샤를 드 푸코(Charles Eug?ne de Foucauld de Pontbriand) 성인은 나자렛 예수님을 유일한 본보기로 삼고 세상 끝까지 그분을 닮기 위해 길을 나선 ‘사막의 은수자’다. 나자렛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육화해 유다인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사막의 무슬림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삶으로 복음을 보여준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삶을 알아본다.
■ 신 없는 세상의 한 청년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 드 푸코는 대주교를 배출한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 드 모를레는 할아버지 때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집안 출신이었다. 산림 조사관이었던 아버지는 지방 출장이 잦았지만,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샤를과 그의 동생 마리에게 가톨릭교회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6살이던 1864년 어머니가 임신 중 건강이 악화돼 사망하자 아버지도 몇 달 뒤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샤를 남매는 친할머니에게 맡겨졌지만 그도 곧 사망하고, 외조부 보데 드 모를레의 보살핌을 받았다. 샤를은 “할아버지께서는 한없는 자상함으로 나의 어린 시절에 사랑과 온기를 가득 채워주셨다”고 회상했다.
학창 시절 샤를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과 잔병치레로 학교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샤를은 책을 좋아했다. 그는 손에 잡히는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의 신앙에 악영향을 미치는 책들도 많았다. 샤를은 점점 신앙은 물론 종교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
1876년 샤를은 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878년에는 기병학교를 졸업했다. 장교로 임관한 샤를은 로렌과 알제리 북동부에서 복무했는데, 그때 외할아버지가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샤를은 유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먹고 자기만 하는 생각 없는 삶을 살아 ‘뚱보 푸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성지의 은수자
군대 생활에 싫증을 느낀 샤를은 전역 후 1883~1884년 모로코, 1885년에는 사하라 사막을 탐험했다. 그는 광활한 사막에서 고독을 느끼고 그 안에서 알라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의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프랑스로 돌아온 샤를은 1886년 사촌누나에게 소개받은 앙리 위블랭 신부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고해성사를 보고 교회와 화해하면서 성체를 모셨다. 다시 신앙심을 갖게 된 샤를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다.
샤를은 1888년 말부터 1889년 초까지 4개월 동안 팔레스타인 일대 성지를 순례한 후, 1890년 나자렛의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했다. 샤를은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있는 아크베즈 지역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지냈지만, 수도원 안 보다는 주로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과 생활했다.
늘 더 큰 고독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트라피스트회를 떠나 1897년 나자렛으로 돌아가서 글라렛 수녀원의 문지기로 살며 1900년까지 밤낮으로 묵상과 기도에 전념했다. 허드렛일과 경건한 독서, 성경 공부, 기도로 가득한 생활을 하던 그는 1900년 아크베즈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사제품을 준비한 후 1901년 6월 9일 43살에 프랑스 남부 비비에 지방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 모든 이의 형제가 된 샤를
사제품을 받은 샤를은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아베스 지역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샤를은 베니 지역에 살고 있는 무슬림 부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적 형제’가 되고자 했다. 샤를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들의 형제로 바라보기를 원했고, 이들은 나의 집을 ‘형제의 집’이라고 불러 감동받았다”고 회상했다. 샤를은 스스로 ‘예수 성심의 형제회’라고 이름 붙인 은수처에서 늘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동안 조배를 했다.
1905년 샤를은 베니 아베스를 떠나 알제리 남부의 도시 타만라세트 근처 아세크렘에 은수처를 마련한 뒤, 그곳에서 11년 동안 생활했다. 샤를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투아레그족과 조화롭게 지내면서 이들의 언어와 관습을 배웠다. 투아레그족의 문학적 전통을 지키고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투아레그족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부족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샤를은 혼란의 와중에 약탈을 위해 쳐들어온 호전적 무슬림인 사누시(Sanusi)파에 납치됐다. 그들을 막으러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나자 샤를을 지키던 한 젊은이가 당황한 상태에서 그의 머리에 총을 쏘고 말았다. 그렇게 샤를은 1916년 12월 1일 사하라 사막에서의 영적 여정을 마무리했다.
샤를이 선종한 후, 그의 영성은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그는 사막에서의 삶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누렸다. 그는 비그리스도교 대중 안으로 파고들어 간 선구자였다. 아프리카의 비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안에 살며 복음적 삶을 실천해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했다. 1933년 ‘예수의 작은 형제회’, 1939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등 그의 영성을 따르는 삶을 사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그는 2005년 시복됐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샤를 드 푸코 신부는 성체와 복음의 삶의 중심에 두고 인류와의 일치를 위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편적 형제애로 부르신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5월 15일 샤를은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