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불’ 밝혀온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의 발자취<상> /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 반포 6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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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성 요한 23세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반포 60주년이자, 한반도가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지구촌은 반세기 이전부터 외친 평화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불구덩이 전쟁 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상의 평화」에 대해 “먹구름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이라며 “회칙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정치·군사적 대립에 따른 핵 위협의 ‘먹구름’은 여전히 전 세계에 드리워져 있다.
어느덧 한 해를 보내고 대림 시기, 그리고 주님 성탄을 앞두고 있다. 수없이 발발하는 전쟁 속에서 끊임없이 ‘평화의 불’을 밝혀온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2회 연재하며, 평화를 기원하면서 한 해를 닫고자 한다. 교회는 평화라는 강렬한 한 줄기 빛을 위해 내년에도 ‘평화의 촛불’을 들고 서 있을 것이다.
성 요한 23세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
“결코 평화가 ‘무기라는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상의 평화」 110항)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장벽은 세상과 인류를 둘로 나눈 상징이었다. 성 요한 23세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가 반포되기 2년 전 일어난 사건이다. 또 반포 6개월 전, 인류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 직전까지 치닫는 상황을 겪었다. 냉전과 핵 공격의 위협이 도사린 당시는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한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무기로 맞서는 전쟁터가 된 지구촌 한복판에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문헌으로 경종을 울렸다.
평화의 범주를 확대해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평화의 저해 요소로 본 「지상의 평화」. ‘평화 헌장’으로 불린 이 문헌 이후 즉위한 모든 교황은 전쟁의 도덕적 타락성을 줄곧 경계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대변혁의 시기에 있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유엔을 방문해 군비 축소를 요청했다. 그리고 1968년부터 매년 1월 1일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라크 전쟁 등을 접하며 더욱 긴급히 평화를 요청했다. 교황은 ‘기술보다는 윤리’를 더 강조하고, ‘사안보다는 인격’을 더 중시하며, ‘물질보다는 정신이 더 우월하다’고 호소했다. 9·11 사태 이후 긴장 국면이 이어지던 시기 선출된 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는 반전(反戰) 메시지를 선포하며 평화의 기틀을 마련한 베네딕토 15세 교황의 이름을 계승했다.
「지상의 평화」가 반포되고 20년 후인 1983년에는 미국 주교회의가 사목 서한 「평화의 도전」을 발표했다. 1980년대 미소 냉전으로 핵무기 경쟁이 지속되던 가운데, 당사국인 미국 주교들이 평화의 가치를 진지하게 성찰해 호소한 문헌이다. 성경과 인간 이성의 전통에서 비롯된 실질적 평화 개념을 제시했으며, 「지상의 평화」의 기초였던 정의와 인권에 뿌리를 둔 평화를 호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불가피한 결론은 핵전쟁이다.”
“가자지구 민간인 사망자만 1만 6000명을 넘었다.”
러시아 육군 대장 알렉산드르 드보르니코프는 지난 10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핵전쟁’이란 섬뜩한 발언을 쏟아냈다. 하마스 공보실은 이-팔 전쟁 2개월여에 이른 최근 전쟁의 참상을 희생자 수로 전했다. 「지상의 평화」 반포 60년, 「평화의 도전」 발표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국지적 냉전’은 이어지고 있다.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입각해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에 의한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있지만, 매우 체계적이고 엄격한 제한을 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마저도 우려하고 있다. 교황은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오늘날에는 ‘정당한 전쟁’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를 위하여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발전되어 온 합리적 기준들을 지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258항)고 밝혔다. 또 “겉으로는 인도주의와 방어나 예방 차원이라는 온갖 구실을 내세우고 정보 조작도 서슴지 않으며 쉽게 전쟁을 선택하는 일이 일어난다”(258항)며 정당하다고 내세우는 전쟁의 명분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은 지난 6일 수요 일반 알현에서도 “전쟁은 언제나 패배만 남길 뿐”이라고 거듭 우려하며 여전히 요원한 지상 평화의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교황은 핵 실험, 핵 보유에 대해서도 계속 경고한다.
전쟁과 평화, 핵무기와 교회
“원자력을 자랑하는 현대에서는 전쟁이,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불합리하다.”(「지상의 평화」 127항)
교회는 핵무기 보유와 사용의 부도덕성을 강력히 비난한다. 교회는 「지상의 평화」 반포 이후 60년간 지속해서 지구촌 핵무기 제거를 요구해왔다.
유엔 주재 교황청 대표 가브리엘 카치아 대주교는 11월 27일~12월 1일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핵무기금지조약 제2차 당사국 회의’에 참석해 “핵무기금지조약은 핵무기 없는 세상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대화를 통해 이 목표로 나아갈 수단을 제공한다”며 “이 조약은 군축 윤리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수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티칸은 2021년 발효된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장 먼저 서명한 국가 중 하나다. 전 세계 93개국이 서명했고, 이 중 69개국이 비준했다. 하지만 정작 핵을 보유하고 있는 미·북·중·러 4개국에서는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산타페대교구장 존 웨스터 대주교는 지난해 1월 핵무기 경쟁의 중단을 촉구하는 사목서한을 발표했다. 산타페대교구 내에는 미국 핵무기 연구시설 전체 3곳 중 2곳이 있다. 웨스터 대주교는 “산타페대교구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핵무기금지조약을 지지하는 동시에 보편적이고 검증할 수 있는 핵 군축 방안을 모색하는 임무를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에는 미국과 일본 교회 주교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한 파트너십’을 약속한 공동성명을 발표, 핵 군축을 위한 세계의 노력을 촉구했다.
평화의 기준은 가장 힘없는 이들
“인간들 사이에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에 대해 공권력의 적절한 대처 방안이 결여되면, 특히 오늘날에는 위기 상황이 더욱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은 그 기능을 상실한 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지상의 평화」 63항)
교회는 인류를 말살할 수 있는 핵 위협을 강력히 규탄하면서도, 평화를 위해서는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 동반돼야 한다고 밝힌다.
1948년 세계 인권 선언문이 나온 후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기준이 세워졌다. 하지만 힘의 균형이 기울어진 상황에서 이뤄지는 권리의 신장은 약자들에게 오히려 더 극심한 인권 침해를 초래한다. 교회는 이러한 역설을 우려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0월 모든 신자에게 평화의 편에 설 것을 촉구하며 “무기를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과 민중, 무고한 어린이들의 평화에 대한 외침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지상의 평화」부터 60년간 교회는 전쟁의 먹구름 속에서 ‘함께’ 이루는 평화를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 안에서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것”(163항)이라고 천명했다. 「지상의 평화」는 지금도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평화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교회 가르침이 실현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