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불’ 밝혀온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의 발자취<상> / 한반도 평화를 향해 걸어온 한국 천주교회의 여정
폰트 작게폰트 크게인쇄공유
×
교회는 끊임없이 발발하는 전쟁 속에서 ‘평화의 불’을 밝혀왔다. 냉전과 핵무기 위협에 맞서 반세기 넘게 평화를 외친 보편 교회의 노력을 되짚은 지난호에 이어 같은 시기 평화를 향해 걸어온 한국 교회의 여정을 살펴본다. 아직도 철조망을 두고 살얼음 속 긴장이 이어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반도. 전쟁과 정전, 이념 대립의 한 가운데에서 한국 교회가 헤쳐온 평화의 길을 김선필(베드로, 서강대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박사의 특별 기고로 풀어봤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점은, 지금까지 교회가 걸어온 여정이 인간의 삶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함께 웃고, 울고, 때로는 싸우고, 화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교회는 세상과 함께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는 여정을 걸어왔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헌장」 1항)라고 고백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의 고백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삶이 균질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만이 삶 안에서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쓰러져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희망으로 교회 안에서 다시 일어선다.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그렇게 다시 일어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걸어왔다. 한국 교회 역시 지난 세월 세상과 함께 살아오며 종종 넘어지기도 했지만, 주님 안에서 다시 일어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해왔다.
공산주의와 교회
광복 직후, 한반도 북쪽은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했다. 유물론을 앞세운 공산주의는 종교를 지배-피지배 관계가 반영된 허상, 즉 부르주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으로 보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걸림돌인 그리스도교는 없어져야 했다. 이러한 공산주의를 앞세운 북한 정권은 토지개혁을 명목으로 북한 지역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고, 이에 반발하는 교회 구성원들을 체포하여 죽이거나 추방했다. 이내 발발한 한국전쟁은 북한 정권의 교회 탄압을 더욱 강화시켰다.
교회 구성원들에게 그것은 명백한 박해였다. 자신을 때리는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열에 아홉은 맞서 싸울 것이다. 교회도 그러했다. 더욱이 당시 교회에게 세상은 구원을 방해하는 삼구(三仇) 가운데 하나였기에,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을 박해하는 북한 정권을 ‘악마’, 그들과의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부르며 반공주의에 앞장섰다. 그러나 교회는 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끝내 북한 지역 교회 전체를 잃게 되었다. 때문에 한국 교회의 반공주의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분노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쟁 당시 해외로부터 들여온 원조물자는 신자 수를 급증시켰다. 한국 교회는 불어나는 신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성당을 새로 짓고,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1962년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 교회는 홀로서기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더욱이 같은 시기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한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이후 몰아친 한국의 산업화는 다양한 사회 부조리를 양산해냈고, 그것은 ‘세상 속 교회’라는 공의회 정신을 받아들인 교회 구성원들의 사회참여를 불러왔다. 마음의 상처는 바쁜 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 교회는 이러한 일들 속에서 외부의 적이었던 공산주의와 북한의 존재를 점차 잊어갔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러한 한국 교회를 흔들어 깨우신 분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셨다. 교황께서는 1984년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방한을 준비하시면서, 북한 교회의 상황을 한국 교회에 물으셨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다른 일들에 전념하고 있었기에, 그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충격을 받은 한국 교회는 200주년 기념 사업회에 북한선교부(1982), 주교회의 산하 기구에 북한선교위원회(1985)를 설치하고, 북한을 적에서 형제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민주화 운동 등의 사회참여 경험을 거치면서, 자신을 ‘세상 속 교회’로 인식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면화하는 내적 성숙의 여정을 걸어왔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로부터 상처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치유와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길은 용서에 있음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리듯, 교회는 짧지 않은 시간을 거치면서 더 넓어진 품으로 북한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것은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간추린 사회교리」 517항)의 실천이기도 했다.
이렇듯 한반도에 평화를 불어넣으려는 한국 교회의 노력은 교황청과 북한의 교류, 남북 간의 관계 개선, 북한 내 천주교 신자의 출현, 국내외 성직자들의 방북 등과 연결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누구보다도 김수환 추기경께서 앞장서셨다. 평양교구장 서리셨던 추기경께서는 1995년경 서울대교구 산하에 민족화해위원회를 설치하셨다. 서울 민족화해위원회는 북한 돕기ㆍ교육ㆍ기도운동 등 다양한 민족화해운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한국 교회 안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이어서 주교회의는 1997년에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북한선교위원회의 이름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한국 교회의 지향이 더 분명해졌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증가한 북한이탈주민의 초기 정착 지원 사업에 전국 교구들이 발 벗고 나서면서, 한국 교회의 민족화해운동은 더욱 활성화되어갔다.
진정한 평화를 향하여
하지만 한국 교회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민족화해운동의 일관된 추진을 가로막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감한 북한이탈주민 수는 그들에 대한 지원 사업에 의존해온 각 교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아직도 북한을 적으로 바라보는 일부 구성원들의 존재는 한마음 한뜻으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려는 한국 교회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평화를 향한 한국 교회의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국 교회가 걸어온 여정은 원수에 대한 분노에서 용서와 화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내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십자가의 길, 즉 사랑의 여정이었기에 더욱 어렵고 뜻깊은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여러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한반도에 평화의 씨앗을 뿌려오고 있다. 평화이신 하느님(「간추린 사회교리」 488항)께서 한국 교회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내려주시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