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 10,34-35)
새 신부 시절 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성당에서 만날 때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야기도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었는데 이내 그 청년을 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때부터는 밤늦게 연락을 자주 시도하고 때로는 한밤중에도 만나달라고 하였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본당 수녀님의 도움으로 정리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분명 좋은 마음으로 함께하려고 했지만 무력감만이 남았고,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부모, 형제가 있어도 한 아이를 온전히 인간답게 키우려면 공동체가 함께 돌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달라진 점이 엄청나게 크지 않음에도 이제 더 이상은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함께 돌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이라도 사람을 돌보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고 공동체가 함께 돌봐야 비로소 온전한 돌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다친 사람을 ‘보고’, ‘다가가서’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싸매고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심적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해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훌륭한 응급처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여관에 맡기고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는 혼자 돌보지 않고 지역시설을 이용하여 ‘함께 돌보고’ 그 책임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떠넘김이 아닙니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을 또 다른 사람에게 연결을 해주고 그를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넣어주는 복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본당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 모임 중 또 하나를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삶의 선택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적인 고통 속에 혼자가 되어 고립이 된 사람들에겐 본당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삶의 필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넣어주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이어가는 ‘구원’ 그 자체가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이라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먼저 ①‘보고’ ②‘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③‘공동체와 연결’해주십시오.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과 연결해 줄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선뜻 가기 어려워하는 인근의 구립, 시립 정신건강복지센터들을 미리 알아두셨다가 함께 가준다면 함께 돌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맺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참조)
※그동안 ‘우리는 모두 하나’를 집필해주신 인하대학교 황순찬(베드로) 교수님과 서울성모병원 영성부장 차바우나(바오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서울성모병원 영성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