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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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로 평신도 성직제도 운영, 미사 집전하고 성사 거행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3. 평신도들로만 이뤄진 성직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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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초기 미사를 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서울대교구 가회동성당에서 전시 중이다. 출처=서울 가회동본당 홈페이지

주교 역할 이승훈, 미사집전자 10명 선발

김범우의 명례방 공동체에서의 집회는 최소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강론이 이루어지는 말씀의 전례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인다. 이벽이 “설법(說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강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을사추조 적발사건(1785년)이 있었던 후, 이 집회는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은 말씀의 전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성사(聖事)의 거행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를 실행하는 데 주도했던 이승훈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신자들은 서로 고해하는 방법을 토의하고자 1786년 봄에 가진 모임에서 갑은 을에게, 그리고 을은 병에게 고해하되, 갑과 을 또는 을과 병은 서로 고해하지 못하도록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 모임에서 내가 미사성제를 드리고 견진성사를 거행하도록 결정이 되었습니다. 나는 교우들의 이러한 권유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또 10명에게도 미사를 드릴 동일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경문은 우리 기도서에서 택했습니다…. 그는 사제로 임명되자 「청 캬오 유아 야오」라는 책을 열심히 정독함으로써 거기서 내가 떨어진 모든 죄를 발견하였습니다….”

위 내용은 이승훈이 평신도로서 성사를 거행한 잘못을 깨닫고 북경에 편지를 보내어 여러 가지 문의를 하면서 당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전하는 대목이다. 김범우의 유배가 결정 나고 한동안 조심해서 지내던 조선의 신자들은 다음 해에 다시 모여, 이번에는 세례 예식과 말씀의 나눔 이외에도 고해성사와 미사·견진 등 성사 거행 등을 결의하고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해성사 제도를 실행하면서 서로 맞고해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했고, 이승훈을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서 주교의 역할을 하는 견진성사 집전자로 추대하였으며, 10여 명의 미사 집전자를 선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성사의 거행은 이승훈과 초기 신자들의 무지(無知)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은 더욱 촉진되었고, 신자들이 늘어나는 효과를 낳았다.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가운데 전라도의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더 열심히 미사를 집전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던 중, 신품성사를 알게 되고, 사제의 인호(印號)가 있어야만 성사 집전이 가능하게 됨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지금 성사론이나 교회법도 모른 채 실행하고 있는 이 제도가 독성죄(瀆聖罪, 신성 모독)임을 깨닫게 되었다. 유항검은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이승훈은 다시 윤유일 바오로를 밀사로 뽑아 북경(교구장)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윤유일 바오로의 활동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기로 하고, ‘평신도 성직제도’의 운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1756~1801) 초상화. 한국 천주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주교의 역할을 하는 견진성사 집전자로 추대됐다. 그는 ‘평신도 성직제도’에 따라 지역별로 사제를 임명했다. 그 자신은 한양(서울) 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독성죄 깨닫고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

“(…) 김대건 안드레아의 할머니는 자기에게 영세를 준 자기 삼촌 이단원(존창) 곤자가의 루도비코는, 미사를 드릴 때 금잔을 썼다는 이야기를 했다. 제의는 화려한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었는데, 그 모양은 우리 제의 같지 않고, 조선 사람들이 제사 지낼 때 쓰는 옷과 비슷한 것이었다. 신부들은 중국에서 가톨릭 예식을 집행할 때에 쓰는 관을 썼다. 신자들의 고백을 들을 때 그들은 단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보통 보속은 희사였고, 더 중한 죄에 대하여는 신부가 직접 회초리로 죄인의 종아리를 때렸다.”

위의 내용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대목으로,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성직 활동에 대해 증언하는 부분이다. 성작은 금잔으로, 제의는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고, 동양에서 관을 쓰고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던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속으로 신부가 직접 회초리를 때렸다는 대목이 흥미로우면서도 엄격한 당시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평신도 성직제도’는 한양에서의 모임에서 임명받은 사제들이 지역별로, 즉 전라도는 유항검, 내포 지역은 이존창, 경기 일대는 아마도 권철신·정약전 등 그리고 서울은 이승훈이 맡고 있었다. 이처럼 나름대로 지역별 구분이 있는 체계적인 조직 운영과 제의와 성작 등의 제구를 갖추면서 시작한 것 같다. 그 후 그들은 좀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러한 성직제도가 사제품이라는 인호(印號)를 받고 나서야 가능함을 알게 됐고, 성사를 받기 위해서 성직자를 국내에 영입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 초상화. 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직후 교리를 배워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됐다. 이후 ‘평신도 성직제도’ 하에서 이승훈에 의해 사제로 임명, 전라도 선교를 일임해 훗날 ‘호남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조선에서 기적으로 교회가 탄생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이 독특한 제도를 보통 ‘가성직제도’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이 용어 안에 한자어 ‘가(假)’에는 ‘거짓의’ 혹은 ‘임시의’라는 부정적인 뜻이 들어 있어서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된 바 있다. ‘신자 교계제도’ㆍ‘모방 성직제도’ㆍ‘평신도 교회 운영제’ㆍ‘평신도 교직계’ 등 여러 용어가 나왔다. 또한 「사학징의」에 ‘권도신부(權道神父)’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권도’란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시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규범’, 곧 ‘임시방편’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따라서 당시 통용되던 용어이므로 ‘권도성직제’라는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만일 권도(權道)라는 한자어가 오늘날에도 잘 사용되는 용어라면 ‘권도성직제’가 가장 적당하다고 하겠다. 향후 학술적인 논의를 거쳐 이에 대한 일치된 의견이 도출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거행된 명례방 집회에 이어서 이듬해 1786년 봄부터는 이른바 ‘평신도들로만 이루어진 성직제도’가 비밀리에 운영되어 성사(聖事)가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교회법적으로 불법이었지만 신자들의 입교에는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독성죄가 되는 것을 알았던 교회 지도자들은 윤유일 바오로를 선택하여 북경으로 밀사를 보냈다.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북경 주교 구베아는 조선에서 기적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음을 교황청에 알렸다. “중국 만주에 접한 조선 나라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갔다는, 성교회를 위해 실로 기쁜 광경이 이곳 북경교회에 일어났습니다….”(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 1790년 10월 6일 북경에서)

이렇게 한국 교회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기도 공동체로 출발하였고, ‘평신도 사도직’을 열정적으로 수행하였던 교회이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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