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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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5.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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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초남이성지 성해 안치실에서 현시 중인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복자(사진 가운데)와 권상연 야고보 복자(왼쪽), 1791년 신해박해 순교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의 유해. 가톨릭평화신문 DB
 


구베아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 사목 지침

윤유일(바오로)의 두 번에 걸친 북경 파견과 구베아 주교의 사목 지침은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구베아 주교가 보내준 사목 서한은 남겨져 있지 않지만, 그가 교황령을 근거로 조상 제사 금지를 명했으므로 정확한 지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자의 사당(祠堂)에서 공자를 공경하며 예식, 의례 그리고 제사를 거행하는 것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사원 즉 조상들에게 바쳐진 사당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신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공경하며 위패(位牌) 앞에서 이 같은 제사, 의례 그리고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돌아가신 조상들의 위패를 자신들의 집에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교황령 「Ex quo singulari」, 1742년 중에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의 묘소에서 나온 백자사발지석 명문. 가톨릭평화신문 DB

윤지충, 신주 불태우고 제사 거행하지 않아

즉 이러한 철저한 지침을 들은 조선 교회 신자 중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를 준수하기 위해 유교식 상례(喪禮)를 어기게 되었다. 1791년 가을 진산군에 사는 윤지충이 모친상을 치르는데, 유교식 상장례를 쓰지 않고,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해년 가을 호남 진산군의 사학인(邪學人) 윤지충(정약용의 외종)의 어머니가 죽자 상장(喪葬)의 예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두건만 착용하고 상복[衰]을 입지 않았고 또한 조문도 받지 않았다.”(「벽위편」 권2 ‘신해진산지변’)

남인 가운데서 서교(西敎)를 공격하던 홍낙안은 진산군수와 체제공에게 긴 글을 올리면서 빠른 처벌을 요구하였다. 진산군수 신사원이 윤지충의 집으로 가 확인해 보니, 정말 사당 안에 위패가 모셔져 있지 않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처음에 겁이 나서인지 잠시 피신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삼촌이 자신을 대신하여 잡혀 있다 하니, 그들은 10월 26일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군수의 신문 후 전라감사 정민시의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라도 감찰사 정민시의 신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족(士族: 양반)의 집안에서 신주[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차라리 사족들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기를 원하지 않아 신주를 집 마당 안에 묻었다.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올리는 일도 천주교에서 금한다. 서인(庶人)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일은 나라에서 엄히 금한 적이 없고, 궁핍한 유자(儒者)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예(禮)에서 엄히 막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일은 단지 천주의 가르침일 뿐이지 나라에서 금하는 일을 어기지 않은 것 같다. 조문(弔問)을 막지 않았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녀갔던 조문객이 있다. 장례의 예는 천주교인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어머니 장례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친상이 늦어진 것은 전염병이 생겨 외부인과 서로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장杖 30대를 맺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주는 끝내 태웠고 그 재를 마당 안에 묻었다. 8월에 어머니를 장례 지낼 때도 신주를 세우지 않았다.

이러한 관찬 기록을 보아도 윤지충은 천주교 신자의 제사 금지 명령을 듣고 그 규율을 지키기 위해 집안 사당에 모셔두었던 신주를 태워 땅에 묻었고, 어머니 장례 때에도 신주를 세우지 않았다.
 
복자 권상연 야고보의 묘소에서 나온 백자사발지석 명문. 가톨릭평화신문 DB

사대부의 규율보다 천주의 법 더 우선시

교회 내에서 전승해 오는 「죄인지충일기」에는 윤지충이 신주를 태워 묻은 이유에 대해 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만약 제가 그것이 제 부모님이라 믿었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불태울 결심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신주에는) 부모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불태웠으며, 그것들을 땅에 묻든 불태우든 여하튼 먼지로 되돌아가니, 거기에 심각함이 더하고 덜할 것이 없습니다.”

천주교 규율을 지키기 위하여 양반의 상장례 예법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예식적인 허례허식뿐 아니라, 신주에 혼(魂)이 깃든다는 유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천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영혼(靈魂)이 있음을 증거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음양오행의 기(氣)의 작용으로 순환적 세계관을 가졌던 유교에서 사람에게 고유한 영혼을 부여하여 단 한 번의 삶을 살게 하는 직선적 세계관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신주를 훼손하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 차용하고 있던 「대명률」의 ‘발총(發塚: 무덤을 파냄)’ 조항, “아비나 할아비의 신주를 훼손하는 자는 시신(屍身)을 훼손하는 율에 비한다”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형률은 참형(斬刑)에 비정된다.

여기에 덧붙여서 「대명률」 ‘금지사무사술(禁止師巫邪術)’ 조항에도 위반되는데, 그것은 윤지충이 사대부의 규율보다 천주의 법을 더 우선시했으므로, 사학(邪學)을 한 죄를 물은 것이다. 이 죄는 형률이 교살(絞殺)에 해당하였다. 이렇게 두 가지 죄가 모두 해당할 때에는 그중에 높은 형률을 적용하였다. 그 외에도 사대부 중심의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는 죄를 물어 강상죄(綱常罪)를 적용하여 이른바 부대시참(不待時斬), 즉 사형 판결이 난 후 즉시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1791년 12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5일간 효수경중(梟首警衆: 백성들을 경계시키려고 올빼미 머리처럼 시신을 보여주는 것)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집은 웅덩이를 팠으며, 재산은 몰수하고, 진산군은 현으로 강등당했다.



한국 최초의 공식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2014년 시복식 때 한국 최초의 공식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가 복자가 되었다. 그리고 2022년 그들이 땅에 묻힌 지 꼭 230년 만에 복자의 성해(聖骸)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초남이 바우배기에 이장된 날이 1792년 10월 12일이므로 1791년 참수형이 있은 지 10개월 만에 이장된 것이다. 아마도 시신을 조용히 수습하고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유항검이 소유하고 있던 땅에 묘를 얻어 나란히 묻었고, 1801년 윤지헌까지 묻음으로써 순교자들의 무덤이 된 것이다. 폐제분주(廢祭焚主), 곧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인들이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얼마나 충실히 지키려고 했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노력과 함께 그 안에 담긴 천주의 인간 존중(각 사람에게 고유한 영혼을 주심)과 인간 자유, 특히 신앙의 자유에 대한 외침이기도 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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