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신학·철학 결합한 비잔틴 미술
거룩함·아름다움 표현하기 위해
형태·입체감·그림자·명암 철저히 배제
실제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구성
하느님만이 선이시고 아름다움의 근원
사랑의 하느님은 그분만이 ‘선이시고, 아름다움의 근원’입니다. 이에 관해 하느님의 표현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신은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라고 보는 파(派)도 있으며,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높으신 분한테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감각적 드러남’)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 교부들은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보이는 빛 또는 정신적인 빛의 상징을 통해 우리를 이상 세계와 연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다시 쉽게 해석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빛이 나옴으로써 아름다움이 발생하게 되고, 그 아름다움은 광휘와 화려한 색채를 이루고 그 결과로 천상의 아름다움이 지상에도 재현될 수 있다고 보고, 또 영혼을 높일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의 미소, 또는 아기의 얼굴과 미소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왜 아름답다고 느낄까요? 착한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 아기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티 없는 모습에는 선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선함, 순수함은 어디서 올까요?
선은 아름답다
그렇다면 ‘선(善)은 아름답다(美)’고 하는 동일성의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선과 미는 논리적으로는 다릅니다. 선은 추구하고자 하는 도덕적 이상(理想)에 따른 행동과 생각에 관한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알아보는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름다움은 이를 알아보는 느낌이고, 그에 따른 적당한 크기(비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오감에 기준을 두어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조건으로 아름다움의 조건을 표현해 봅시다. 인간이라면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을 할까? 아마도 선행, 부드러운 말과 위로, 율동, 글, 음악, 색깔, 맛과 냄새를 통해서? 아니면 여러 가지를 합해서 또는 조합을 통해서일까요?
누구나 여러 가지 행동과 방법 또는 도구를 동원해 종합적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않을까요? 모든 예술이 아름다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각적으로만 본다면 아름다움에는 색이 필수조건이 될 것입니다.
감각적 이성과 합리적 이성
플라톤 철학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질은 본래의 이상적인 원형에서 물질세계에 드러났기 때문에 이 존재들은 두 세계를 연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초기에 그리스 교부들의 생각은 감각적 이성¹이 합리적 이성²보다 못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쉽게 설명한다면 아름다운 색상이나 율동,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이론적 글로 표현한 것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콘의 이미지(像)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콘 공경론자들의 입장입니다. 글을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내용도 오감을 통한 느낌으로도, 즉 그림이나 예술을 사용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의 의미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좋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그분의 눈으로 보아도 ‘만족스럽다’ ‘훌륭하다’ ‘아름답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의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가 합쳐진 아름다움입니다. 즉, 빛과 맛, 소리, 중량, 힘 등이 포함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좋았다’를 (우리가 평가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우리도 ‘좋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답다’로 표현하기로 합시다. 아름다운 이유는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작품이기 때문에, 또한 하느님의 선하신 목적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가장 최적의 조합에 맞는 창조물입니다. 또한, 의도하신 목적에 합당하기 위해서 창조된 세계는 적당한 수와 무게와 척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카파도키아 교부에서 알렉산드리아 교부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 아름다움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도 내재되어 있다고 클레멘스(A.D. 150~215)는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인식할 수 있는 눈을 통해 내적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게 되고, 결국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인간은 미술과 음악을 모든 의전행사나 교회의 전례와 전례 도구에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것은 최고의 감각적이고 합리적 이성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상태임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 펼쳐진 온갖 대자연과 생물들의 종류와 아울러 서로의 연관성에도 정말 감탄합니다. 지상에 빛과 적당한 열을 주는 태양이 있고, 밤에는 달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빛 물체로 온기가 생기고 그로 인해 파도가 생기고 바람이 일어나고, 따라서 구름과 온기를 실어나르는 바람으로 생명수인 물이 흐르고, 하늘의 별들, 과연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조화롭습니다.
따라서 이콘을 그리는(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그 구성과 비례와 빛과 재료로 그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최소한이라도 써 보려고 노력합니다.
심미적 아름다움을 위한 방법 시도
하느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한다면, 나름대로 방법상의 구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한 표현으로 인간의 눈에 그대로 보이는 현실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즉 동식물의 아름다움, 삼라만상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둘째, 현실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변환시켜 구사하는 심미적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물론 이 심미적 아름다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또한 문화ㆍ사회적인 요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됩니다.
비잔틴 미술은 미학, 신학, 철학이 결합해 실제로 보이는 것을 얼마간은 다르게 표현하여 심미적 아름다움을 위한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즉, 거룩함, 성스러움에 적합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인물의 적절한 왜곡과 물질적인 냄새를 제거하는 탈물질화³를 사용했습니다.
탈물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물질의 본래 속성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대상을 이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데 필요한 만큼 변형된 형태로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어느 형체를 받아들이더라도 현실성을 느끼는 형태, 입체감, 그림자, 명암, 생물적인 육체성, 원근감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이러한 미관(美觀)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예술로 본다면 왜곡된 이콘(聖畵像)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잔틴 세계의 그리스도교 관점으로 보면 고유하고 나름대로 타당성 있는 성화(聖畵)인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설명할 신학적 개념을 이콘에서는 심미적 미학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각주
1) 이에 해당하는 것은 예술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난 이성(근본원리), 또는 로고스.
2) 여기서는 언어적, 논리적인 체계에 의해 드러난 이성.
3) 실제로 보이는 것을 어느 정도 변형된 형태로 표현하려는 방법, 쉬운 예를 들면 동양화가 심미적 예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