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모든 존재 중 최고의 지성을 가진 인간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 또 내 안에 그분의 영이 존재함을 믿어왔습니다. 그렇기에 두 손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찬미가를 부릅니다. 그렇다 해도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얼굴’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해 많은 것을 비유를 들어 소상히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이콘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모습을 표현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표현의 한계를 설명합니다.
어느 날 두 친구가 밖을 내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야! 밖에 하얀 눈이 내려서 정말 아름답고 깨끗하게 보이네!” 그렇지만 한 친구는 시각장애인이었기에 하얀 눈이 차갑고 손바닥에서 녹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하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하얀 것이 어떤 것이야?” 친구는 색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응, 하얀 것은 백조와 같지. 백조는 하야니까.” “백조는 어떻게 생겼는데?” “백조는 이렇게 생겼지”하며 친구가 오른 손가락을 모으고 팔목을 구부려 새 모양을 만들고 친구에게 만져보게 했습니다. 친구의 손과 팔뚝을 만져본 다른 친구는 이해했다는 듯 “아하, 하얗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과연 하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했을까요?
하느님의 빛은 ‘빛나는 어둠’
하느님에 관해 설명할 때 인간의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적 공백이 생깁니다. 이럴 때, 부정(否定)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굳이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 즉 억지로 표현하려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이콘에서 표현하는 하느님의 빛에 대해 살펴보면, 하느님의 빛은 세상의 빛과는 다르게 어둡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물리적 빛(태양 빛, 전기나 불빛)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현현(顯現)하실 때는 오히려 어둠이 동반되는 경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콘에서는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빛을 짙은 검푸른 색으로 표현하며, 이를 ‘빛나는 어둠’이라 부릅니다. 그 어둠은 태초 이전의 빛, 아마도 우주 탄생 이전의 빛으로 유한한 인간이 보는 빛과는 다른, 무한하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빛으로 보이는 장면입니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그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창세 15,12-13)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해 아브람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동물들을 반으로 갈라 양쪽으로 마주 보게 차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온종일 기다려도 하느님께서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독수리 떼들이 피 냄새를 맡고 하늘을 떠돌아, 그는 새들을 쫓기에 바빴습니다. ‘해 질 무렵’은 아직도 해가 있으므로 어두울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포와 암흑이 그를 휩쌌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현현하실 때는 ‘공포와 깊은 잠과 암흑’이 동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밖으로 드러난 성자 하느님으로 표현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계약의 궤를 모시는 의식을 열었습니다.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는데,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다”면서 솔로몬이 나오며 말합니다.
“그때 솔로몬이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1열왕 8,12)
이콘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예수 승천에도 하느님의 현현을 의미하는 어두운 광휘를 그립니다(작품1 참조). 물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경우 성경에서는 빛이 눈부시게 예수님을 감쌌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이콘은 특정한 경우, 예수님을 밖으로 드러난 성자 하느님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 이콘에서는 그분을 중심으로 짙은 구름을 기하학적인 단순화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작품2 참조).
(작품1)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의 대답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거나 일부는 어느 예언자 중 하나가 부활했을 거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 16)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사랑을 보여 주셨어도 그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했으며, 돌아오지도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는 인간이 주는 영광에 더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이사 6,10 참조)
예수님은 산(타볼) 위로 오르십니다. 산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시편 121,1)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고, 수난 저녁에 겟세마니 산에도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빛의 모습과 동시에 어둠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 둘러싼 짙은 구름은 성령의 추상적 형태
예수님의 얼굴과 옷은 태양과 같이 빛나고 주변의 모든 것은 그분에서 나오는 빛으로 ‘어둠 속으로 비치면서’(요한 1,5) 밝아졌습니다. 어둠은 믿음의 어둠을 상징화하고, 하느님의 현현을 상징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현현하실 때 ‘그분은 어두워진다’를 이콘에서는 보여 주며 이를 ‘빛나는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 엄지와 약지로 인성과 신성을 보여 주시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시며(요한 1,18; 12,45-46), 따라서 그리스도는 천상과 지상의 연결점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만돌라)로 둥근 것은 짙은 구름이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구름이 아니고 성령의 추상적인 구름 형태입니다.
(작품2) ‘성자 하느님과 지혜의 천사군단’을 살펴보겠습니다. 옥좌에 앉아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성자 하느님으로 표현합니다. 어두운 만돌라 형태로 둘러싸여 있으며, 붉은색으로 그려진 네 군데의 동물은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천사 모습은 예수님의 족보부터 시작하며 마태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사자 모습은 마르코 복음서를 나타내고 시작은 사자처럼 소리치는 요한 세례자의 설교로 시작합니다. 루카 복음서는 희생 제물을 상징하는 소와 함께 사제의 역할을 하는 즈카르야가 처음부터 등장합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동물로 영성적인 면을 처음부터 도입한 요한복음서를 의미합니다. 발판은 관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나타내며, 발판의 붉고 둥근 원은 옥좌의 천사이며 수많은 눈이 박혀있습니다. 만돌라 안의 짙은 구름 안에는 수많은 지혜의 천사(케루빔)가 주님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들고 있는 성경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을 수 있으며, 그중 많이 그려진 것은 ‘짐 진 자는 나에게 오라’(마태 11, 28)라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