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공식적으로 파견된 첫 선교사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다. 그는 중국 강남 소주부 곤산현 출신이었다. 20세에 혼인한 적이 있지만 3년 만에 자녀 없이 부인을 잃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가 이를 포기하고 북경에서 신학을 배우고 구베아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42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 선교사로 파견된 해가 1794년 겨울이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인길이 마련한 집에서 6개월간 조선어를 배우면서 성무활동을 거행하다가 밀고되어, 피신 생활을 하다가 주로 강완숙의 집에 머물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교우들과 만났다. 따라서 그의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회장 제도와 명도회를 활용하고, 한글 번역을 통한 문서 선교에 집중하게 되었다. 회장(會長) 제도는 성직자가 부족한 지역에서 교리교사(catechista, 카테키스타)를 두어 교리교육을 돕도록 하는 것인데, 전교 지역에서는 회장이 단순히 교리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우촌의 교리교육, 기도생활 지도는 물론이고 유아세례, 신자들의 혼인, 성사 준비 등 사제와 교우들의 중재 역할을 하도록 했다. 조선에서는 특히 여성의 교리교육과 세례 준비를 위해 ‘여회장’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고, 교리교육과 외교인 선교를 위해서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실시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성무 집행하며 문서 선교에 힘써
명도회는 주 신부가 북경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던 단체를 모방하여 교리 연구 및 전교를 위한 모임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교리에 밝은 정약종을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하였고, 하부 조직으로 3~4인, 혹은 5~6인의 소그룹 형태의 회(會)를 구성하여 매월 첫째 주일 모임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한 달간의 활동인 신공(神功), 곧 기도와 선행 등 활동을 보고하고 교리 연구를 했다. 명도회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 중에 열심한 이들이 명부에 등록한 후에 1년간의 활동을 주 신부에게 보고한 후 그 평가에 따라 회원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 명도회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이 많았고, 이 중 3분의 2가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여성들도 명도회 회원으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리연구와 전교활동을 통해서 나온 교리서가 정약종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다. 정약종은 여러 한문 교리서와 한문 성경 등을 참조해 배우지 못한 이들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매우 쉽고 분명하게 한글로 교리서를 집필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천주(天主)가 계심을 안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그 세상의 주인을 가리켜 ‘임자’ 곧 주인이라고 지칭하고, 그 천주가 사람에게 고유한 영혼을 부여하여 영원히 살도록 했다는 분명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주 신부는 이 한글 교리서가 완성되었을 때,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정교하게 쓰인 한문교리서 「성세추요」보다도 요긴하다면서 바로 인준해 주었고,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이후에는 목판본과 활판본으로 배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801년 박해 때 천주교 서적이 압수되어 소각될 때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당시 남아 있던 책 제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120종 117권이었고, 그중 83종 111권이 한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종류도 성경·전례서·성사·기도서·묵상서·성인전·교리서 등 다양한 천주교 서적이 있었다. 주 신부의 문서 선교 노력은 이처럼 많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박해 일자 피난길 나섰다가 돌아와 자수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주 신부는 일단 피신하였다. 남구월이라는 시녀가 주 신부를 전동에 있던 양제궁(良宮)으로 피신시켰다. 양제궁은 죄인으로 유배된 은언군의 거처였으므로 폐궁(廢宮)으로 불리었는데, 거기에는 은언군의 부인 송(宋) 마리아와 며느리 신(申) 마리아가 있었다.(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는데, 그의 아들 이담이 역모죄에 연루되어 연좌제로 폐출(廢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신유박해 때 부인 송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죄로,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연좌제로 사형을 받았다. 후에 그의 손주가 철종으로 즉위하였다.)
송씨와 신씨는 나중에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죄로 사약을 받았고, 천주교 신자는 자살할 수 없다고 하여 강제로 사약을 먹게 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주 신부는 힘들게 피난길을 가서 황해도 황주까지 도피하였으나, 마지막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한양으로 되돌아와 자수하였다. 주 신부는 3번에 걸쳐 추국을 받고 여러 번 신문을 당하면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조선 정부가 지적한 그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주문모는 신부·교주를 자칭하면서 종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면서 수많은 남녀를 속이어 꾀어냈다. 법석을 열고 세례를 주니, 속임에 불과한 학설이 7~8년 사이에 차차 번져서 물들고 그르침이 더욱 깊어졌다. 그 학설이 화가 되고 걱정이 됨은 이적금수의 지경에 모두 빠지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 받고 순교
주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신부가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두루 둘러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자, 군졸이 술 한잔을 바쳤습니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남쪽 10리 되는 연무장(한강 모래밭의 이름은 노량)으로 갔습니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보게 하였습니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읽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습니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눈부시어,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황사영 「백서」 중)
순교복자 주문모 야고보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는 다블뤼 주교가 수집한 「조선 순교자 역사비망기」에 나온다. “주 신부의 복사 중 한 사람이 꿈에서 피바다를 보고, 폭풍 속에서 흰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자신을 구해준 이야기를 전하였다. 주 신부는 다음과 같이 꿈을 풀이하였다. ‘머지않아 큰 박해가 이 나라 안에 일어날 터이지만 그 박해로 천주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성모님이 붙들고 있는 이상 천주교는 완전히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복사는 박해를 피하라고 하는 주 신부의 말을 듣고, 1801년에 화를 당하지 않고, 4~5년 후에 평화롭게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주 신부의 말대로 한국 천주교회는 앵베르 주교의 청원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주보(主保)로 모시고 박해를 견디고 발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