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언급한 어두운 구름을 빛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분은 원천적인 빛이시라는 하느님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대변합니다. 실상 우리 인간이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 또는 불빛, 전기에 의한 빛인 물리적인 빛이고, 그 빛이 필요한 것은 생물체들입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하느님에 대해 부정적(否定的)1)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것은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이렇다저렇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신’이란 개념(槪念)은 인간적 개념이기 때문에 모든 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확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신학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긍정적2)인 서술로서 “하느님은 …이다. 또는 하느님은 …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신의 실재에 대한 논리적인 이성과 교리적인 이해를 통해 신을 인식하는 신학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정의이시다’라고 하느님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부정신학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인간들의 언어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즉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에 관한 설명은 일부분, 또는 외연(外緣)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언어보다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오도(誤導)의 확률이 적다는 것입니다.(필론,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우리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이 아닌 것들을 통해서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당신의 활동을 통해 보이게 되십니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활동을 통해 모습 드러내는 하느님
다마스쿠스 요한네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으로 이미 신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아는 한 원천적으로 ‘스스로 있다’라는 개념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별할 때 다른 대상과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알아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라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은 자신이 다른 것에 의해 구별되지 않는 자립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 는 나’라는 것은 어떠한 다른 대상과 비교할 필요없는 절대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봅니다. 아버지가 밤늦게 집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릴 때, “누구세요?”라고 가족 중 누군가가 묻게 됩니다. 아버지는 “나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가족들은 다른 아버지들과 비교할 필요없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경우에 견주어 보면 하느님에게는 온 우주와의 관계에서 비교 대상이 필요없는 초월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에 ‘나다’ 하실 수 있습니다.
부정신학에서 강조하는 것
하느님을 안다는 것과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라는 두 주장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카파도키아의 교부 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의 능력으로부터 그분을 안다고 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인간에게 내려오지만, 그분의 본질에 대해서는 가까이할 수 없는 채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자연을 초월해 계시며, 모든 존재 위에 계시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는 구별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통해 느끼게 되고, 그분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됩니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우리의 한계적 지성(限界的 知性)에 의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정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영역을 남겨두고 접근의 한계를 부각하는데 초점을 둡니다.
부정적 언어를 사용해 도를 설명한 노자
비슷한 예로 동양 사상에서 노자는 신(神)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성(神性)이라는 비인격적인 것을 도(道)라 했습니다. 그는 도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면서, 도를 도라 하면 이는 이미 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도는 말로써 표현되지 않으므로 언어적으로 설명할 때는 ‘~도 아니고 ~도 아닌’ 것과 같은 부정적 언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모든 지식을 넘어 알 수 없는 어둠에 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암흑에 도달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도 큰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분의 두 본성이 ‘뒤섞이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으며, 나뉘지 않으며, 분열되지 않으며’ 등의 표현으로 정의되었는데, 이는 부정적인 서술 방법으로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방법론적으로 표현한 결과였습니다.
‘알 수 없음’을 아는 것도 큰 깨달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교부들은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유한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분과 닮은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 합니다. 따라서 부단한 노력으로 하느님을 찾으면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조금씩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3)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그 자체, 그 본질로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 지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논리 신앙적 차원서 접근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에 관한 논리는 이성적 차원이 아닌 신앙적 차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아주 쉬운 예 중 하나로 세상의 비극적 사건과 악이 횡행해도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아파하시면서 왜 침묵하시는 것인지를 세상은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부분은 믿음으로 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분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금욕, 고행, 헌신, 자기 성찰 등과 같은 수덕생활, 자기 비움과 윤리적, 도덕적 삶을 통해 정신과 영혼에 더 가치를 두게 되었습니다.
어둠으로 빛나는 구름에 둘러싸인 예수
(작품1)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코라 성당의 이콘 작품은 많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여기서 ‘코라’라는 의미는 ‘초월적 존재가 머무는 무한의 공간’, 즉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물론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삼차원 공간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승에 가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하신 일은 어둠 속에서 오른손은 아담을, 왼손은 하와의 손목을 잡아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죽음의 관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이는 총체적으로 사람(아담)을 죽음에서 구하시는 모습입니다. 아담 뒤편에는 요한 세례자와 다윗 왕, 솔로몬 왕이, 하와 뒤편에는 다니엘과 많은 예언자가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어둠으로 빛나는 구름에 기하학적 삼층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맨 위의 문자는 ‘아나스타시스’, 부활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자기 비움’으로, 이 또한 구원계획의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의 빛을 받아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옥문과 온갖 속박을 없애신다는 의미로 지옥문과 자물쇠가 부서져 구덩이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부서진 두 문짝 사이에는 죽음이 묶여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각주
1)부정신학(Theologia Apophatica) - 역설의 언어
2)긍정신학(Theologia Kataphasis)
3)부정신학은 성 디오니시오스가 정리하였다고 추정되는 5세기의 저서이다. 그러나 저작자의 불확실성 때문에 ‘위 디오니시오스’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