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의 박해로 조선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 목자였던 주문모 신부를 잃었다. 교우들의 삶을 한마디로 ‘기도와 성사생활’이라고 할 때, 이제 반쪽인 성사(聖事)는 거행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참된 성사를 위해서 수없이 북경을 오가며 선교사를 요청했건만, 6년이라는 짧은 활동 끝에 순교로 끝을 맺고,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양 떼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34년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와 1836년 모방(베드로) 신부가 들어오기 까지 거의 35년간 사제 없는 조선 교우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살아남은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깊은 산골로 숨어들게 되었고, 박해 시기 교회는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사제는 없었지만, 기도문을 외워가면서 근근이 믿음을 지켜나갔다. 이 시기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신자들이 남긴 옥중 수기와 북경 주교와 교황께 보낸 신자들 편지다. 먼저 신태보(베드로) 복자의 옥중 수기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그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전주에서 체포되어 13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면서 수기를 남겼다.
“박해가 마침내 가라앉기는 하였으나, 우리는 서로 뿔뿔이 헤어져 있었고, 모든 기도문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신자 본분을 지킬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우연히 몇몇 순교자 집안의 유족들이 용인(龍仁) 지방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략) 그들은 기도서 몇 권과 복음 성경 해설서를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깊숙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책을 보자고 청하자, 내 말을 막고 ‘가만히 있으라’고 손을 내저었습니다. (중략) 나는 거기에서 40리 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8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서로 찾아다녔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깊고 진실한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고, 주일(主日)과 축일(祝日)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었습니다…. 마치 신부를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기쁨과 행복이 번졌습니다….”<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11~12쪽>
신유박해 이후 교우들은 산속에 숨어들어
이처럼 신유박해 이후 남아있던 교우들은 산속에 숨어들어가 찢긴 기도문과 성경을 보면서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외우던 기도는 오늘날 주님의 기도 등 주요 기도문들과 주일 미사를 대신하던 ‘첨례경’이라는 기도문이었다. 성경은 「성경직해광익」이라는 주일과 축일 복음 해설서를 가리킨다. 위의 내용 중에 신태보와 함께 있던 교우가 그 깊은 산골짜기에서 신태보의 입을 막고,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은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천주교와 연루되어 붙잡혀 갔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이다. 신태보는 40년 넘는 신앙생활 가운데 사제를 한 번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주문모 신부를 6년간 찾아다니다가 못 만났다. 그는 전주의 옥에서 순교하기 전 해인 1838년 샤스탕 신부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받는 기쁨을 누렸다.
“올해에 저는 사형 언도를 받은 채 12년째 감옥에 갇힌 5명(신태보·김대권·이일언·이태권·정태봉)의 복된 신앙 증거자를 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간수들은 이 죄수들을 성실한 사람들로 인정해서 이들에게 노동을 하여 생활비를 벌게도 하고, 감옥소에서 따로 지은 별채에서 함께 살 수도 있게 해 주었고, 감옥소에서 나와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할 수도 있도록 허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신자들이 고백하는 죄를 저에게 서면으로 보내주었고, 저는 그들과 잠시 만나 몇 마디의 훈계를 한 다음에 사죄의 기도를 하여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샤스탕 신부 서한 중에서, 1838.10.16.>
무려 13년이나 갇혀 있다가 1839년 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은 말하자면 ‘모범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토록 사제를 만나고자 열망했던 신태보는 순교하기 1년 전에 샤스탕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샤스탕 신부의 권면으로 지나간 신앙생활을 수기로 적었다. 원문은 찾을 수 없으나, 그 내용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다.
화전 일구고 옹기 구워 팔며 생계 이어가
교우촌 신자들은 미신을 피하고자 외교인들과 떨어져 산속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황무지에 씨를 뿌리거나 나무뿌리나 잎을 먹고 살았다.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기도 하고, 담배농사·옹기점·숯막 운영 등을 생활수단으로 삼았다. 옹기점을 많이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가 쉽고, 옹기를 팔기 위해 여러 곳에 다니면서 흩어진 신자들을 찾거나 많은 정보를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 옹기장이는 사회적으로 천대받은 직업이었기에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부류였고, 일이 고되지만 4~6배 정도의 이문이 남는 수익을 낼 수 있었다. 다만 좋은 흙을 소모하게 되면 또 다른 흙을 찾아 장소를 옮겨야 했다. 교우촌의 삶은 역시 ‘파공첨례(罷工瞻禮)’라고 일컫는 주일 집회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그 지역 교우촌 혹은 공소 회장이나 집안의 가장(家長)이 주도하여 함께 첨례경을 바치며 기도하고, 성경과 교리서를 읽고 주일 집회를 하며 보냈다. 그 첫 시작기도는 다음과 같다.
‘무시무종하신 전능 천주여, 나 비록 불감한 죄인이오나 너의 내신 바라. 이제 네 앞에 나아와 너를 찬송하려 하오니, 너는 내 천주시요, 임자시요, 나를 내시고 구속하신 이심을 인함이요…. 내 죄악의 무수함과 예비가 타당치 못함을 생각하여, 어찌 황송치 않으리요, 마땅히 너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찬송하여야 하겠거늘 도리어 너 지극히 어지신 주께 죄만 지었으니 진심으로 절통하여 하나이다…. 주여 내 기도함을 들으사, 내 모든 죄악과 모병과 네 마음에 합치 않는 모든 것을 없애어 주시고 내게 요긴한 덕을 주사, 내 본분을 착실히 지키며 너를 타당히 섬기게 하시고, 또 모든 일을 도무지 네 영광을 위하여, 나와 남의 구령함을 위하여, 연옥영혼을 위하며, 특히 내 친척과 내게 은혜 준 자를 위하여 유익하게 하소서…. 너 내 천주시요, 내 대부시요, 내 모든 정(情)의 마땅히 향할 바로소이다. 아멘.’<「천주성교공과」 첨례경 중 ‘초행공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