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6. 마카오에 체류하다
프란치스코 샤싱 주교. 1826년 10월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 도착했을 당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하다
저는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마카오교구는 작은 형제회 출신 프란치스코 샤싱(Francisco de Nossa Senhora da Luz Chacim) 주교가 1804년부터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또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 라자로회 수도자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마카오에는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거주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움피에레스 신부가 포교성성 대표부장, 바루델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포교성성 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는 마카오 주교좌 성모 성탄 대성당과 도미니코회 수도원 사이에 있습니다.
포교성성 대표부는 1732년 중국 광동성(廣東省) 광주에서 이곳 마카오로 이전했습니다. 그때부터 1776년까지 도미니코회 수도원 내에 대표부를 두고 활동했습니다. 포교성성 대표부는 청나라 건륭제(1711∼1799)가 가톨릭교회에 유화책을 펴자 1776년 다시 광주로 옮겼다가 선교사 18명과 중국인 교우 400여 명을 체포한 ‘건륭대교안’(1784∼1786)이 일어나면서 1787년 마카오로 되돌아왔습니다. 정미년(丁未年)이던 1787년 신생 교회 조선에서는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었죠. 그해 겨울, 성균관 인근 한양 반촌(泮村) 김석태의 집에서 정약용·이승훈 등이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 유생들에게 들켜 이기경·홍낙안 등이 가톨릭을 비판하고 배척한 사건입니다.
비오 7세 교황. 1811년 조선 교우들로부터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으나 여력이 안 돼 도움을 주지 못했다.
조선 교우들, 사제 보내달라고 교황께 편지
저는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장 바루델 신부에게서 새 선교지를 배정받기까지 2개월간 마카오에 체류하면서 움피에레스 신부뿐 아니라 1819년 북경에서 추방당한 프랑스 라자로회 라미오(Louis-Francois-Marrie Lamiot) 신부와 교분을 맺었습니다. 라미오 신부는 1820년부터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추방될 때 중국인 설 마태오 신부를 북경 프랑스 라자로회 장상으로 임명했습니다. 설 신부는 청 조정의 박해가 심해지자 북경의 중국인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라미오 신부는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성 요셉 신학교 바로 옆집을 빌려 북경 신학생들을 위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라미오 신부와 나눈 많은 대화 중 제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조선의 교우들이 사제를 보내달라고 교황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조선 교우들의 열성과 신앙 그리고 어떤 박해를 받았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는지 세세히 말해줬습니다.
1784년 1월 말 북경 북당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을 비롯한 정약전ㆍ약용 형제와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조선에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죠. 그러자 당시 북경교구장 알렉산더 드 구베아 주교(Alexandre de Gouvea, 1751~1808)는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레오나르도 안토넬리(Leonardo Antonelli, 1730~1811) 추기경에게 조선 관할권을 북경교구에 맡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관할권을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한 선교단에 맡기지 않고 교황청이 관장하면 북경교구의 평화가 깨질 것이라고 포교성성 장관에게 협박했습니다.
레오나르도 안토넬리 추기경. 포교성성 장관으로 조선 교회 관할권을 북경교구가 아닌 구베아 주교에 한정해 허락했다. 하지만 구베아 주교의 후임 북경교구장 주교들은 교황청의 뜻을 왜곡해 권한이 없는 조선 교회 관할권을 주장하고 행사한다.
알렉산더 드 구베아 주교.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고 스스로 교회를 설립하자 조선 교회 관할권을 주장했다.
조선 관할권,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맡겨
이에 당시 비오 6세 교황(재위 1775~1799)은 1792년 조선 관할권을 북경교구가 아닌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북경 현지에선 이 조치를 조선의 관할권이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베아 주교가 선종한 후에도 후임자인 수자 사라이바 주교(Joaquim Sousa Saraiva, 1744~1818)와 남경교구장으로 북경교구장 서리도 겸한 포르투갈 라자로회 소속 가예타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Cajetan Pires Pireira, 1769~1839) 역시 조선 관할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해 사제 영입 운동을 펼칩니다. 권기인(요한) 등 8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1811년 비오 7세 교황(재위 1800~1823)과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에게 사제를 파견해달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비오 7세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퐁텐블로 성에 감금됐다가 1814년 쇠약하고 병든 몸으로 겨우 로마로 돌아와 조선 교우들에게 도움을 줄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은 좌절하지 않고 사제 영입 운동을 다시 시도합니다. 이번엔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이 주도했습니다. 그는 1816년 이후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가 있을 때마다 거르지 않고 따라가 북경교구 선교사를 만나 사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이여진(요한, ?~1830)도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교우들’이란 이름으로 1811년과 1813년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와 비오 7세 교황께 드리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러나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가 1818년 1월 선종하고, 청 조정의 가톨릭 금교령으로 선교사들은 북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마카오에 머물게 되면서 별다른 성과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사제 영입 운동의 주역들. 그림 왼쪽부터 성 조신철 가롤로,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이들은 1824년(혹은 1825년) 비오 7세 교황에게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1826년 10월부터 두 달간 마카오에서 머물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편지의 내용을 듣고 조선 선교를 희망한다. 미리내 103위시성기념성당 소장.
조선 선교 청한다면 가장 먼저 제가 자원
이에 정하상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하던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791~1839)은 1824년 북경에서 교황께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동지사 수석 역관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정하상·조신철(가롤로, 1794~1839)·이여진과 함께 북경 남당에서 북경교구장 서리로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를 만났습니다. 1823년 입교해 이때 처음으로 북경 교회를 방문한 그는 조신철과 선교사들에게 아우구스티노와 가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유진길과 동료들은 교황께 드리는 탄원서가 중국인 손에 들어가 신원이 탄로 날까 ‘암브로시오’라는 가명으로 작성했습니다. 이 편지에는 사제들의 조선 입국을 위한 열세 가지 방법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사제가 탄 배에 서양말과 서양 풍속을 아는 중국인을 태워 그가 조선 관헌들과 협상하도록 했습니다. 또 배를 한성 가까이에 있는 인천·부평·안산·교하·통진·남양·김포 지역에 정박시키고, 하선 후 즉시 막사를 세워 머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야만 감시가 엄한 관헌에 머물면서 조사받지 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임금에게 줄 의학 서적과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선물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꼭 임금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교서를 받을 것을 충고했습니다. 아울러 사제를 태운 배를 추방하려 한다면 떠나지 말고 버티라고 했습니다.
한문으로 작성된 이 편지는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로 보내졌고, 제가 마카오에 도착한 지 한 달 보름여 지난 1826년 11월 29일에 움피에레스 신부가 라틴어 번역을 마쳤습니다. 때마침 한문에 해박한 라미오 신부가 한문과 라틴어 번역문을 대조해 이 편지 내용을 교정하고 있었습니다. 라미오 신부는 이 편지 내용을 제게 소상히 들려주었습니다.<본지 제1746호 1월 28일자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 - 1824년 조선 교우들이 교황께 보낸 편지를 접하다’ 기사 참조>
전에도 밝혔듯이 만약 포교성성이 우리에게 조선 선교를 청한다면 가장 먼저 제가 자원할 것입니다. 이제 조선 선교는 저의 운명입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