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감사 노트를 통해 성찰의 힘을 체험한 기자는 내면을 응시하는 작업이 힘들지 않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식사 시간 가족과 함께 말씀 묵상을 시작한 기자는 디저트를 겸해 이스라엘 순례의 기억을 나눴다. 생태적 회개 4주차를 맞은 기자의 ‘행동’에 동참하고자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는 포기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사순 4주차, 기자들의 도전과 실천은 이어진다.
■ 성경 쓰기
쓰기 집중하며 생긴 분심… ‘밥상머리 묵상’으로 해결
필사 4주 차. 페이지를 채우는 데는 익숙하다. 함께하는 가족들도 행여 하루라도 밀릴까 정해진 시간이면 식탁 위 필사 책 페이지를 열고 펜을 든다. 그런데 ‘쓰기’에 익숙해진 탓일까. 한 구절 한 구절 의미를 묵상하며 찬찬히 글을 써 내려 나가기보단 ‘몇 줄 남았지?’, ‘넘치지 않으려면 자간을 좀 좁혀야겠는데’라는 분심이 묵상을 앞선다. 한 페이지 다 채우고도 정작 오늘 쓴 말씀이 ‘뭐였지?’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밥상머리 묵상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3월 10일 주일 점심. 성경 필사 구절(마태 5,3-12)이 묵상거리로 올랐다. “행복하여라”가 모두 여덟 번 등장하는, ‘참행복’, ‘진복팔단’(眞福八端)에 관한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게 좀 이상하고 헛갈리지만 말야. 좋은 뜻인거 같아.” 딸은 첫 번째 행복을 마음에 와닿는 구절로 꼽았다. 신자라면 누구나 몇 번씩은 들었을 법한 구절이지만 마음의 가난에 대한 해석은 묵상하기 나름이라 생각한다.
‘마음을 비운 겸손일까’, ‘물질적으로 가난해 정말 배가 고픈 것일까.’ 점심식사로 배를 채우며 나눔은 이어졌다. 결론은 일주일 동안 깊이 생각해 보고 다시 나눠보기로 했다.
“아빠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자리에 직접 가봤었지.” “그때는 전쟁이 없었나 보네?” 딸에게는 가자지구에서의 전쟁으로 익숙한 이스라엘이기에 나올법한 반문.
노트북을 열고 외장하드에 담아 놓은 2009년 이스라엘 취재 사진을 열었다. “여기 꽃이 활짝 피어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예수님께서 오르셨을 거라 생각하는 산이야. 이 성당은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당. 매년 많은 순례자가 찾아 기도하고 있어. 제대 앞에 서면 행복에 관한 구절이 적힌 천장을 볼 수 있었는데…, 나중에 시간 내 꼭 한번 가보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말씀이 십수년 전 사진 몇 장으로 더욱 깊이 다가왔다.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 생태적 회개 - 미니멀리즘
안 쓰는 물건 비웠더니 ‘뿌듯함’이 채워졌다
쓰레기 줍기와 금육, 제로웨이스트. 3주간 환경을 위해 실천하며 깨달은 것은 인간의 삶이 가벼워졌을 때 생태적 회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아껴서 소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지구를 위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실천 4주차. 평소의 내 삶을 돌아보며 사순 시기 4주를 시작했다.
평소 생활 습관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곳은 방이다. 빈틈없이 물건들로 가득 찬 방안을 둘러보다 몇 달간 손을 대지 않은 물건들을 추려봤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여러 벌 구입한 같은 모양의 티셔츠, 다이어트에 성공한 뒤 입겠다고 사둔 사이즈가 작은 바지, 가격표도 떼지 않은 신발과 화장품도 여러 개 있었다.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구매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미리 사둔 물건들, 즉 과소비의 결과물이었다.
사순 4주차에는 몸과 마음을 비워야겠다고 결심하고,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는 지인에게 물었다. 그는 “2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방 안에서 수년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꺼내 놓자 상자 몇 개가 가득 채워진다. 이중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것, 낡아서 재활용할 수 없는 것은 버리고 한두 번 입었던 옷들은 기부하기 위해 따로 분류했다.
쓸만한 물건들은 가톨릭여성연합회가 운영하는 사랑마트에 기부하기로 했다. 디자인이 예뻐서 사둔 스웨터는 너무 두꺼워서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터라 ‘내년 겨울에는 입지 않을까?’라는 물욕의 마음이 올라온 찰나,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지인의 말이 떠올라 마음을 거둔다. 비움을 실천한다는 소식을 들은 옆자리 선배가 입지 않은 옷들을 기부했다. 생태적 회개 4주차가 되자 동참하고자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생겼다. 포기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텀블러와 우산까지 담은 무거운 쇼핑백을 챙겨 사랑마트에 전달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이날 내가 기부한 것은 쇼핑백 하나를 채운 물건들 몇 개에 불과하지만, 내가 비운 것들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뿌듯함으로 채웠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 감사 노트
피하고 싶던 내면,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
무(無)에서 유(有)를 이끌어내는 창조력 덕분인지 이번 주는 감사한 일을 많이 찾아냈다. 토요일은 모처럼 침대를 벗어나는 일 없이 푹 쉴 수 있었다. 아몬드 브리즈가 맛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일상에 신선함을 가져다줬다. 음료를 마셔도 건강에 문제가 없고, 살 수 있는 돈이 있어 행복하다는 등 여러 감사를 뽑아내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점점 풍부해지는 감사 노트처럼 나의 내면에도 계속 긍정이 차올랐다는 내용으로 끝맺어졌다면 참 보기 좋은 결말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내 펜 끝으로 묘사된, 좋은 것들 일색인 세상은 오히려 내가 노트를 읽고 쓸 때마다 교묘한 수치심을 심어놓고 있었다. “거봐, 널 괴롭히던 건 결국 너 혼자였다니까?”하는 비웃음이었다.
그래서 노트를 다 쓰면 명상에 잠기는 버릇이 들었다. 그 께름칙함을 피하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역효과를 낳았다.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소소한 감사함들을 지극히 피상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치환해 버리는 최고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였다.
“불안에 끌려다니고, 스스로 잡아 뜯는 버릇을 못 고치는 내가 감당이 안 된다.”
감사할 일이 아닌데도 노트에 적고야 말게 되는 건, 노트만이 가져다주는 신묘한 성찰의 힘을 믿기 때문이었을까. 이불을 덮고 누운 어느 날 밤 예기치 않게 불쑥 답이 주어졌다. “그런 나를 내가 만난 것도 감사할 일”이라는 역발상이었다.
“많이 불안했던 만큼 많이 조심스럽기도 했어. 또 자책하지 않고서야 사람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어.”
늘 내게 도전만을 가져다주는 ‘불안’과 ‘자책’에 ‘조심성’과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외면하고만 싶었던 내면을 응시하는 작업이 아주 힘들지는 않게 다가왔다. “내가 또 날 괴롭히더라도, 난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붙일 수 있을 거야”라는, 내면 어딘가에서 너울거리는 힘이었다.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