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으로 기억한다. 광화문 쪽에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탔는데, 목적지에 다다랐을 즈음 창밖으로 현수막 하나가 보였다. 내용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 관련이었다. 짧은 현수막에 압축적으로 표현된 내용은 명품백 제공 사건이 북한의 대남 공작이라는 주장이었다.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명품백을 받은 영상이 공개되자, 보수 일부에서는 선물을 제공한 사람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즈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 유명 정치인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범죄심리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건희 여사는 덫에 걸린 피해자이기에 덫을 놓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며, 자신은 명품백을 제공한 사람이 “간첩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했다. 이러한 주장이 일반에 영향을 미쳐 실제로 이번 사건을 대남공작에 의한 북한의 남파 간첩 사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대통령 배우자가 간첩과 접선하고 선물까지 받은 것은 문제 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대통령실이 북한의 공작에 경호 시스템이 무너지고 보안이 심각하게 뚫린 점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화시켜보면 명품백 제공자는 나쁜 사람이지만, 나쁜 사람에게 선물을 받은 사실과 나쁜 사람에게 대통령실 보안이 무너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라 믿고 의견을 낸다면, 간첩에 대한 위험뿐 아니라 그게 가능했던 보안 시스템과 이후 수습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나가지 않는다. 간첩, 대남공작. 이것은 그냥 상대를 비방하기 위한 언사로만 작동하는 형국이다.
사실 북한은, 이렇듯 많은 순간 우리가 얼마든지 미워해도 되는 상대로만 호명된다. 정말로 북한이 한 행동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책임을 묻고 수습할 것인지 따지지 않고 증오하는 것, 딱 거기까지만이다. 물론 이번 사건에도 북한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간첩이다’, ‘대남공작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문제는 전혀 다른 프레임으로 전환된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북한과 같은 편 아니냐는 시선에 갇혀버린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정치인들이 문제의 원인을 북한, 혹은 간첩으로 지목하면 -이를 꽤 충실히 믿는 사람들이 여전한 현실에서- 상황은 너무나 손쉽게 뒤집혀왔다. 80년 가까이 튼튼하게 쌓여있는 미움과 증오를 살짝만 건드리면, 있던 일도 없게 되고 없던 일도 큰일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12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가 국정원에 의해 어떻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는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유우성씨는 2015년 10월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벌어진 대표적 간첩 조작 사건 100여 개의 목록이 나온다. △1958년 진보당 사건, 조봉암 사형 집행-2011년 무죄 △1959년 심문규 이중간첩 사건, 사형 집행-2012년 무죄 △1961년 민족일보 사건, 조용수 사형 집행-2008년 무죄 △…사형 집행…무죄 △…사형 집행…무죄 △…사형 집행…무죄. 우리 안에 증오와 적개심이 자리하고 있는 한, 간첩과 대남공작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에게는 오히려 남북이 소통하고 화해하는 게 더 두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젠 간첩을 다시 보는 게 아니라, 간첩이라 말하는 자를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올드 패션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정수용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