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의사가 된 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 여겼다. 진료를 통해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온 ‘박언휘종합내과’ 박언휘(엘리사벳, 69) 원장 이야기다. 40년 넘게 의료 사각지대를 찾아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박 원장이 2월 LG의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살신성인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는데, 제가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타인의 삶’. 박 원장을 만났다.
부르심이자 꿈
살신성인이란 부모님 가르침 따라 의사의 길
장애인 위한 점자 약봉지도 개발
40년 넘게 인술과 나눔 앞장서
봉사와 나눔, 그리고 믿음
한센인 진료 비롯 해외 봉사 등 낮은 곳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진료, 등록 환자만 8만 명
진료 전 반드시 기도하고 주님께 의탁
박 원장의 삶의 자리
대구 수성구에 위치한 박 원장의 병원. 토요일 늦은 오후임에도 병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환자들 사이로 박 원장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대기 중이던 모든 환자의 진료가 끝났을 때 비로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시간으로만 봤을 때 제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의사일 겁니다.” 진료를 끝낸 박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월·수·금 오전 9시~오후 9시, 화·목·토 오전 9시~오후 7시 30분, 주일에는 오전 9시~오후 1시까지 진료하니, 틀린 말이 아니겠다.
“사람들이 그렇게 돈 벌어서 뭐하냐고 물어봐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돈을 좋아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박 원장이 이토록 일에 매달리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제 주머니에 1000원이 있으면 1000원밖에 줄 수 없지만, 1만 원이 있으면 1000원을 남겨도 9000원을 줄 수 있잖아요. 많이 나눠주고 싶어 많이 일하는 겁니다.”
박 원장과 달걀 한판
박 원장은 의사가 된 후 1982년부터 경북 성주의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본격적인 나눔과 봉사를 시작했다. “보건소에 결핵 환자들이 많았어요. 결핵은 잘 못 먹으면 걸리거든요.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 보건소 앞 시장에 가서 달걀을 샀어요. 그리고 환자들에게 약을 주면서 달걀 한판씩을 줬어요. 하루에 달걀 한 개씩이라도 먹으라고요. 단백질을 먹으니까 환자들이 좋아지더라고요.”
박 원장은 주말이면 인근에 있는 한센인 마을에 가서 환자들을 진료했다. “의사인 독일 수녀님이 그곳에 사시면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어요. 그 모습이 너무 감명 깊었고, 신앙의 힘이 참 크다는 것을 느꼈어요. 지금도 소록도 진료를 가면 그 수녀님이 생각납니다.”
보건소 근무를 하며 나눔과 봉사를 하던 박 원장은 미국으로 갔다. “제대로 봉사하려면 실력이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아프리카에 가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던 중 잠시 들른 한국은 여전히 건강보험제도(당시 의료보험)가 없었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박 원장은 1988년 한국으로 들어와 성당과 교회·절을 빌려 무료로 진료했고, 거동이 어려운 환자와 장애인을 찾아다니며 진료했다. 그리고 베트남·필리핀·태국 등 열악한 의료 환경에 처한 나라를 다니며 진료했다.
2004년부터는 소외계층에 해마다 1억 원이 넘는 백신을 기부하고 있고, 2005년 병원 개원과 함께 ‘박언휘슈바이처나눔재단’을 만들어 장애인 지원, 장애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나눔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잘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위한 ‘점자 약봉지’를 개발한 이도 박 원장이다. 현재는 보건소와 복지시설·장애인시설 등을 다니며 노인과 장애인의 건강을 관리하는 촉탁진료를 하고 있다.
부모의 가르침
살신성인(殺身成仁). 박 원장은 어릴 때부터 이 네 글자를 마음에 새겼다. “부모님이 살신성인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거든요. 어릴 땐 그 뜻을 몰랐는데, 상을 받고 나니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제가 정말 살신성인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도 됐고요.” 박 원장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도 말했다.
울릉도가 고향인 박 원장은 어릴 때부터 의사의 꿈을 꿨다. 그가 어릴 때 울릉도에는 병원이 없었다. 병에 걸리면 육지로 나가야 했는데,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려면 12시간이 넘게 걸렸고, 겨울에는 그나마도 배가 없었다. 상처가 나도 치료를 받지 못해 패혈증으로, 또 맹장염이 복막염이 돼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읽었고, 가끔 의사인 선교사들이 울릉도에 와서 사람들을 치료했는데, 그분들을 보면서 의사의 꿈을 키웠죠.”
하느님의 부르심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울릉도에서 다닌 박 원장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꿈에 그리던 의사에 한발씩 다가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급격히 어려워진 가정환경은 박 원장의 발목을 붙잡았다.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성탄절 전날 삶을 포기하려 했다.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하고 정신을 잃은 뒤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며칠 만에 눈을 떠보니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를 보시더니 크게 야단치셨어요. 의사라는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고, 하늘이 준 천직,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요. ‘부르심을 받고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가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느냐’면서요. 그때 결심했어요. 내가 의사가 된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고요.”
신앙의 힘
현재 박 원장의 병원에 등록된 환자는 8만 명이 넘는다. 봉사 다니면서 만난 환자들까지 더하면 10만 명이 훨씬 넘는다. 수많은 환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다. 다리 절단 진단을 받은 환자가 완치 후 세례받은 일, 가능성이 없다던 암 환자를 치료해 완치 판정을 받은 기적과 같은 일, 심한 화상으로 치료받은 장애인이 감사 편지와 귤 한 상자를 보내왔던 일 등 그에겐 모두 소중한 인연이다. “저는 환자를 만나기 전 항상 기도합니다. 그러면 정말 완치가 어려운 환자들도 완치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신앙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박 원장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아껴줄 때 함께 행복해지는 겁니다. 외로움, 고립감, 자신만 불이익을 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묻지 마 범죄도 생기는 거로 생각해요. 사람들이 좀더 마음을 열고, 나누고, 행복할 수 있으면, 묻지 마 범죄 같은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봉사와 나눔은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박 원장. “우리는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돼요. 잘 못 걷고, 눈이 잘 안 보이고, 귀가 잘 안 들리잖아요. 그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봉사하고 나누면 누군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위해 봉사해주고, 나눠준다고 생각해요. 하느님은 우리가 한 만큼 복을 주시는 분이시잖아요. 내가 봉사하고 나눴을 때, 그 사랑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봉사하고 나누지 않을 이유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