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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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 “제가 조선에 가겠습니다” 선교 의지 피력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11.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대목구 설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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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

마침내 교황청에 전달된 조선 교우들 편지

1811년과 1825년 전후로 보낸 조선 교우들의 편지는 마침내 교황청에 전달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또한, 1816년 이후 정하상(바오로)의 중국 북경 왕래와 유진길·조신철 등의 활동은 마침내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과 1834년 1월 중국인 유 파치피코(여항덕) 신부의 입국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미사와 성사의 은혜를 받고 싶은 신자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런데 여기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교사가 있었다. 바로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이다. 한국 교회가 보편 교회에 정식으로 편입되는 조선대목구 설정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초대 대목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역할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조선 선교지는 1690년 이래 포르투갈의 선교 관할권(Padroado) 교구인 중국 남경교구(南京敎區)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조선인 신자가 생겨나면서 1792년 4월 북경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어 조선 선교지는 북경 주교의 지도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유박해(1801년)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 북경으로부터 성직자는 더 이상 파견되지 못했다. 1826년부터 북경교구까지 관할하게 된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G. Pires-Pereira, 畢學源) 주교는 조선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부) 경리부 대표로 있던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는 중국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신자들이 1825년경 교황에게 보낸 서한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교황청에 전달하면서 조선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수도회에 맡길 것을 건의하였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북경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여 한문에 해박한 라미오(프랑스 라자로회) 신부에게 번역문 검토를 의뢰하였다. 마카오에서 번역된 날짜가 1826년 11월 29일로 되어 있다. 이때는 마침 브뤼기에르 신부가 샴(현 태국)대목구 임지로 떠나기 위해 마카오에 대기하던 시기와 겹쳤다. 따라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움피에레스 신부와 라미오 신부를 통해 조선의 신자들이 성직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브뤼기에르 신부가 샴대목구의 페낭을 가기 위해서 바타비아 항구에 있을 때 프랑스 카르카손교구의 드 귀알리(de Gualy)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1826년 연말에서 1827년 연초 사이에 쓴 것이다.
 
1658년부터 1925년까지 파리외방전교회 아시아 선교지 지도를 실은 엽서. 왼쪽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함께 설립자인 프랑수아 팔뤼(왼쪽)·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가 그려져 있다. 팔뤼 주교는 통킹(베트남 북부)·라오스와 중국 남서부, 라 모트 주교는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와 중국 남부에서 선교하며 파리외방전교회 기반을 다졌다.

브뤼기에르 신부, 조선 신자들의 편지 접해

“중국 동북쪽에 조선이라 불리는 왕국이 있습니다. 19세기 초 북경에서 개종한 어느 조선인 청년의 열성으로 천주교가 이 나라에 전래되었습니다…. 사제 한 명을 조선의 신입 교우들에게 파견하였고, 그는 이 민족을 개종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도착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붙잡혀 순교하였습니다…. 조선의 교우들은 1817(1811년의 오류)년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로마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올해도 또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만났던 포교성성 대표부 신부님은 그 편지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포교성성에서 유럽의 사제들에게 호소하듯이 우리에게도 호소한다면, 저는 그 즉시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브뤼기에르 신부가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브뤼기에르는 동아시아 선교를 자원한 선교사로 샴대목구에 발령을 받아 파견되지만, 조선과 같이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선교지에서 요청이 온다면 지체 없이 가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포교성성 장관은 카펠라리 추기경으로, 조선 교우들의 편지와 움피에레스의 의견을 듣고 십분 공감하였다. 그래서 유럽에 있는 선교회들 가운데 조선 선교를 담당할 곳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예수회는 해산되었다가 이제 다시 시작하는 상황에서 선교사가 부족하여 조선 선교를 맡기에는 어려웠고,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았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어려운 시기를 겪다가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었다. 카펠라리 장관은 파리외전 신학교 교장인 랑글로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고, 답장이 왔다. 답장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우선 부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첫째, 현재 관할 선교지에 지장 없이 선교사가 보충될 것인지, 둘째, 선교를 위한 비용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셋째,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넷째, 현재 파리외전 선교지의 장상들이 이 새로운 임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등에 대해 해결한 후에야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랑글루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아달라고 요청한 1827년 서한.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담당 요청

카펠라리 추기경은 다시 편지를 보내어 조선 선교지를 위해 초기에 필요한 비용을 포교성성이 지원하겠다고 밝혔고, 조선 입국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보와 함께 유진길의 서한 번역문을 동봉해주었다. 랑글로와 신부는 다시 편지를 보내 입국로를 검토해 보니 안전성이 거의 없고, 실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마카오를 통해서 좀 더 정보를 알아보겠다고 응답하였다. 포교성성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파리 신학교에서는 아시아 지역 선교사들에게 공동서한을 발송하여 의견을 구하였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아시아 지역 선교사는 인도 퐁디셰리와 샴·통킹(베트남 북부)·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그리고 중국 사천·마카오 대표부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각 선교지의 상황은 대부분 천주교 금지 조처 하의 박해 상황이었고, 선교사들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파리본부의 부정적인 입장에서 조선 선교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1829년 5월 19일에 쓰인 브뤼기에르 신부의 편지는 이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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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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