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골 마을의 그림 신동(神童)
저는 황해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농부였고요. 그런데 어릴 적부터 ‘그림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일곱 살 무렵부터 대표로 뽑혀서 사생대회에 나갔으니까요. 그림만 그렸다하면 선생님께서 제 그림을 교실 뒤에 붙였고요.
중학교를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저 보고 “너는 두말 말고 그냥 미술학교에 가라”고 하셨어요. ‘미술’의 ‘미’도 모를 때였는데, 그냥 갔어요. 아버지께서는 집안 형편 때문에 제 미술학교 진학을 쉽게 결정하시지 못했어요. 그런데, 동생이 아버지께 “형을 그냥 미술학교로 보내주세요”라고 말해줘서 아버지께서 마지못해 허락해 주셨죠.
그렇게 1948년 해주예술전문학교에 들어갔어요. 동급생들은 도회지에서 미술학원을 거친 세련된 아이들이었어요. 그들이 보기에 저는 반 거지 촌놈이었죠.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고, 어디 끼워 주는 데도 없었어요. 죽어라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죠. 특히 데생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2학년 때 학년말 학과와 실기평가에서 전과목 만점으로 최우등상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게 화가의 꿈을 키웠죠.
전쟁으로 바뀐 운명
19살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어요. 부대는 평양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에게 졌고, 저는 혼란 속에 도망쳤어요. 그리고 1·4후퇴 때 피란민과 함께 고향으로 가려고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미군과 마주쳤어요. 미군은 피란민 틈에 있던 인민군을 수색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미군에게 잡혀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어요.
다행히 포로수용소에서는 석방됐고, 부산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다가 오산비행장 건설 현장에 동원됐어요. 매일매일 무거운 시멘트를 옮기는 일이 힘들었는데, 어쩌다가 거기서도 초상화를 그리게 됐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같이 있던 친구 두 명이 힘들어하길래 1952년 국군에 자원입대했어요. 술김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서요.
처음에는 군산으로 갔다가 논산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논산훈련소를 거쳐 광주에 있던 보병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았고요. 거기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했어요. 미 육군사관학교 교재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렸죠. 당시는 전선이 고착되고 고지전이 한창일 때였어요. 만일 전방으로 배치됐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몰라요.
당시 정해진 복무기간은 2년 8개월이었는데, 후임자가 없어서 전역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전쟁이 끝났는데도 말이죠. 군 제대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서 미술 공부를 더 하려고 했거든요. 그때 바로 공부를 더 하지 못한 것이 제게는 큰 한이 됐어요. 당시는 군인은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때였으니까요.
번민과 신앙 입문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고자 했던 계획이 틀어지고 나서 잠시 방황했어요. 군복무도 제대로 안 하고요. 그리고 담당 중대장에게 가서 제발 좀 제대시켜달라고 간청을 한 뒤에 제대할 수 있었어요. 제대할 때 나이가 27살이었어요. 갈 데도 없었는데, 광주의 한 출판사에 취직해 거기서 삽화를 그렸어요. 그리고 결혼도 하게 됐어요.
당시 출판사 전무가 가톨릭신자였는데, 저보고 신앙을 가져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했어요. 마침 결혼하고 아내 외가에 인사를 갔었는데, 거기서 교리문답 책을 받기도 했었고요. 신혼집 주인도 신자였고요. 아내가 먼저 세례를 받고, 나중에 제가 받았어요. 세례를 받기 전에 당시 신부님이 찰고를 하는데 어찌나 깐깐하게 보시는지, 매번 퇴짜를 맞아서, 세례를 받는데 2년이나 걸렸어요.
결혼하고 처자식이 생기니 이것저것 일을 많이 했어요. 신문사와 출판사를 쫓아다니며 삽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1960년 호남비료 기획실에 미술요원으로 들어갔어요. 당시 경제 기조는 수출 제일주의였고, 광고나 선전 등에 힘을 쏟을 때였어요. 당시 사장이 김재규였는데, 제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어요. 그리고 1964년 조선일보에서 처음으로 ‘조일광고 미술상’을 제정했는데, 제가 회화 부문 상을 받았어요. 이듬해에는 구도 부문 상을 받았고요.
서울가톨릭미술가회와의 인연
1970년 서울가톨릭미술가회가 창립했을 때 창립회원으로 참가했어요. 당시 고(故) 이순석(바오로) 회장님께서 없어졌던 미술가회를 재창립했는데, 회원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뭣도 모르고 들어갔죠. 어르신들만 잔뜩 계셨고, 저는 심부름이나 하고 그랬죠. 참여하고 싶지 않았는데,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가했던 거죠. 가톨릭 미술가들의 신앙을 위한 모임이라는데 봉사하는 마음으로요.
미술가회 전시회에는 매번 참여했어요. 그러다가 1979년 서울 역촌동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그림으로 봉헌했어요. 지금은 새로 성당을 지어서 제 그림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네요. 광주가톨릭대를 비롯해 여기저기 원하는 성당에 그림도 많이 봉헌했어요. 제가 지금 다니는 양수리성당에는 주보성인인 세례자 요한 그림도 그렸고요. 마침 제 세례명과 같기도 하고요.
요즘에도 계속 그림을 그려요. 나이가 들고 고향 생각도 많이 나서 통일이나 북한의 고향 마을도 그리고요. 어머니께서 저를 낳고 바로 돌아가셔서 그런지,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커요.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그림도 많이 그렸죠.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좋겠어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멈추고요. 얼마나 더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 이동표(요한 세례자) 작가는…
1932년 황해도 벽성군에서 태어났다. 1948년 해주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전쟁 중 인민군과 국군으로 복무했으며, 1960년대부터 어머니, 6·25전쟁의 참상, 실향민의 애환, 통일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며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 제8회 가톨릭미술상, 2022년 제20회 이동훈 미술상을 받았다.
정리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