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10. 방콕에서 조선 선교 관할 여부 묻는 소식을 듣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샴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주교관에 머물며 신학교 교수로, 본당 사목자로,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선교사로 2년간 활동했다. 1922년 방콕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Kraus, Johansen.
1827년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 활동
1827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저의 첫 소임으로 신학교 운영을 맡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로 오랜 기간 재직한 바 있어 신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 했기에 힘들었습니다. 매일 철학과 신학 2시간·라틴어 수업 4시간, 매주 성경 2시간을 강의했습니다.
저는 소임 중 가장 우선으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정신을 따르는 것일 뿐 아니라, 교구의 운명이 사제 양성에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방콕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3명뿐이었으나 22개월이 지난 1829년 4월 지금은 22명으로 늘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소임은 본당 사목입니다. 방콕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성 십자가 성당, 묵주의 성모 성당, 성모 승천 대성당 등 네 곳이 있습니다. 성모 승천 대성당은 성 십자가 성당에 주로 거주하시던 플로랑 주교님께서 주교좌 대성당으로 신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샴대목구의 모든 주요 전례와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됩니다. 저는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주교관에 거주하면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주일이면 방콕 시내 네 성당에서 차례로 미사를 주례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소임은 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을 대리해 교구 행정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오가는 각종 문서를 처리하고 교구의 주요 살림살이를 챙기는 것이 주된 일입니다. 한마디로 총대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플로랑 주교님으로부터 받은 소임은 아니지만, 저는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아이에게 세례성사를 베푸는 일을 빼놓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선교사로서 제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방콕에 도착한 이래로 1600명의 어린이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그들 모두는 외교인 부모의 자녀들입니다. 방콕뿐 아니라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많은 외교인 자녀들이 여러 질병으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고 아이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현지인 신학생을 사제로 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프랑스인 사제가 선교사로 이곳에 오면 수많은 현지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틈날 때마다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 지원하라”는 편지를 조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플로랑 주교,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 청원
2년간 저를 지켜본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1829년 교황청에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저를 당신의 후임으로 샴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진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서였습니다. 얼마 후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1828년 1월 6일 자로 작성한 공동 서한을 받았습니다. 주요 내용은 교황청 포교성성이 조선 선교지를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공동 서한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서한을 읽는 동안 저는 조선을 향한 선교 열망이 다시 불 지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30년 전부터 보편 교회의 도움을 간청해온 이 불행한 이들에게 내 동료들과 헤어지지 않고도 도움을 주러 갈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복받쳐오는 감정으로 후끈 달아올라 제 몸은 전율했습니다. 저는 플로랑 주교님의 두 손을 움켜잡고 주교님께 “제가 이 일을 맡고 싶습니다. 제가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주교님께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면서 제 청을 기꺼이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대가 조선 선교를 원하고 실행하고자 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당신 교구가 풀어가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도 하나뿐인 일꾼을 주님의 새로운 포도밭을 위해 기꺼이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황청은 사제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들의 울부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824년(혹은 1825년) 조선 교우들이 레오 12세 교황에게 보낸 청원을 고려해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Bartolomeo Alberto Cappellari) 추기경은 1827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맡아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해 사제를 파견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1811년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교우들이 비오 7세 교황에게 보낸 서한.
포교성성, 파리외전에 조선 선교 담당 요청
포교성성은 조선 선교를 위해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시도를 펼쳐왔습니다. 교황청은 1807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1801년 신유박해로 조선 교회가 초토화됐다는 보고서를 받은 후 처음으로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기는 데 따르는 위험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포교성성 장관 레오나르도 안토넬리(Leonardo Antonelli, 1730~1811) 추기경은 북경교구장 알렉산더 드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1751~1808) 주교에게 가능한 한 빨리 사제 한 명을 조선에 보낼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요청하고, 북경 신학교에서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아울러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대에 비밀 연락소(교우 공동체)를 설치해 서로 편하게 교회 사정을 교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교황청의 이러한 권고는 구베아 주교가 1808년 7월 6일 선종하면서 성과 없이 흐지부지돼 버렸습니다.
이후 교황청 포교성성은 1815년 12월 30일 구베아 주교 후임으로 북경교구장에 임명된 요아킴 데 수자 사라이바(Joaquim de Sousa Saraiva, 1744~1818) 주교가 보내온 편지를 접수합니다. 그 편지에는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교우들이 쓴 1811년 음력 10월 24일(양력 12월 9일) 자로 교황께 보내는 서한이 들어있었습니다. 조선 교우들이 교황께 보낸 서한에는 “성직자를 보내 줄 것”과 “선교사들이 어려움 없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최선책은 교황이나 포르투갈 임금이 파견한 사절단이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오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포교성성 관계자들은 이 서한 내용을 보고 경탄했습니다. 조선 교우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복했습니다. 모두 조선 선교지에 시급하게 사제를 파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포교성성은 선종한 북경교구장이 갖고 있던 조선 선교지 관할권을 누가 이어받을지, 선교사들을 직접 조선에 보낼지, 포르투갈 왕실 사절단을 요청하는 우회로를 이용할 것인지 등을 논의한 끝에 중국 현지 사정에 밝은 마카오의 포교성성 극동 대표부장 마르키니 신부에게 북경에서 추방된 이들 가운데 조선에 보낼 선교사 한 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 교우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복
교황청 포교성성이 조선에 사제를 파견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보이자 중국의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던 포르투갈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금교령으로 자신의 사목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경에 머물고 있던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는 남경교구 신 플로리아노 벨로조(Xin Florien Vellozo, 43) 신부와 밤 요한(Vam Jean, 29) 신부를 즉각 조선으로 보냅니다. 조선 선교지를 교황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라이바 주교는 밤 요한 신부를 조선 선교지 총대리로 임명하고, 북경교구장이 갖는 권한 안에서 모든 상시적 권한과 특별 권한(혼인 장애 관면, 이동 제대 축성 등)을 그에게 위임했습니다.
또 밤 신부의 유고나 부재 시 신 신부가 그 권한을 승계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이들의 첫 임무는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해 포르투갈 수도회가 운영하는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두 신부는 1817년 1월 4일 남경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출항했지만, 입국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신 벨로조 신부는 병에 걸려 조선 관문에서 선종했고, 이 때문에 밤 신부는 남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마카오에서 듣고 본 1824년(혹은 1825년) 조선 교우들이 레오 12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계기로 교황청 포교성성이 직접 조선 선교지를 챙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