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우거진 험한 산 중턱에서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는 두 남자가 있었다. 첫닭이 우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서로만을 의지한 채 갈증과 허기를 견디며 산을 오르던 동반자다. 이들은 막 예기치 못한 이별을 맞은 참이다.
한 사람은 아전(하급 관리) 출신인 천주교 신자, 다른 한 사람은 문경 일대에서 사목하던 프랑스 선교 사제다. 문경읍내 신자 집에 숨어있던 사제가 외교인에게 발각된 탓에 깊은 산속 교우촌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어느덧 정오가 되고 한숨 돌리던 사제 눈에 탈진상태인 신자 모습이 들어왔다. 지친 그를 마을로 돌려보내고 홀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신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지만, 사제는 단호했다.
“신부님이 알지도 못하는 이 산속 길을 혼자 가시게 두다뇨.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험한 산중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습니다. ”
“내가 말한 대로 할 것을 명령하오. 여기 마티아가 가지고 온 과일(곶감)이 있으니 반을 내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고 가시오. 신부의 말에 순종하시오.”
그렇게 사제는 홀로 떠났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신자는 울고 또 울었다. 병인박해 시기이던 1866년 3월 중순의 일이다. 안동교구 유일한 복자 박상근(마티아, 1837~1867)과 파리외방전교회 칼레(Calais, 1833~1884) 신부 이야기다.(안동교구에서 부르는 명칭은 ‘깔래’다)
‘우정의 길’과 한실교우촌
정도영 신부 부임 후 야외 경당 등 꾸며
‘조선인과 프랑스인’, ‘평신도와 사제’라는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교회사에 길이 남을 우정을 나눈 두 사람.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문경 땅에 그들의 발자취를 다시 부활시켰다. 문경의 진안·마원성지를 담당하는 정도영(안동교구) 신부와 함께. 또 한 번, 평신도와 사제의 동행이었다.
158년 전 박상근과 칼레 신부가 작별한 곳은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에 속한 백화산(해발 1064m)이다. 정 신부와 걸은 ‘우정의 길’은 두 사람의 여정을 부활시키는 순례길이다. 생사를 오가는 와중에 사제와 평신도로서 깊은 우정을 나눈 당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그때나 지금이나 수묵화처럼 늘어선 백두대간 모습은 그대로이니 말이다. 정 신부는 “문경의 자랑은 산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라며 “송전탑이나 풍력 발전기가 없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했다. 박해 당시 교우들이 본 풍경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우정의 길’ 순례를 마치고 박상근과 칼레 신부가 처음 만난 한실성지(교우촌)로 향했다. 1801년경 형성된 교우촌으로, 칼레 신부가 1861~1866년 머문 사목지다. 한실교우촌에는 과거 조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좁쌀을 사러온 박상근은 칼레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곧장 칼레 신부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교우촌보다 신자와 외교인이 섞여 사는 읍내가 사제에게 더 안전하리라고 여긴 것이다.
이곳 교우촌 터에는 지금도 사람이 산 흔적인 도자기와 구들돌·옹벽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살았다는 결정적 증거인 십자가 등 성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주민 증언과 칼레 신부 서한 내용을 토대로 교우촌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산 꼭대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지막 주거지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자들은 가장 외진 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정 신부가 밤나무가 있는 집터를 가리키며 ‘공소 회장집’으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이어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고, 재료를 구하기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므로 교우들은 움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병인박해로 신자들이 사라진 뒤 교우촌에는 동학교도와 화전민이 연이어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3만 평이나 되는 한실성지는 천천히 걷기 좋은 곳이다. 자연이 준 산물로만 꾸민 멋진 야외 경당도 있다. 제대는 산에서 파낸 넓적한 바위로, 신자석은 나무그루터기와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를 잘라 만든 벤치다. 나무 십자가는 못을 안 쓰고 칡덩굴로 동여매 만들었다. 봄이 돼 바위 제대 옆 나란히 선 벚나무에 꽃이 피면 그야말로 ‘장관''이 연출된다.
한실성지는 원래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풀밭이 무성한 임야였다. 4년 전, 정 신부가 이곳으로 발령받아 온 이후 굴착기를 사서 직접 땅을 개간하는 등 공들여 꾸며놓았다. 또 곳곳에 전국에서 보낸 폐성물을 시멘트와 섞어 만든 블록을 놓았다. 정 신부는 이를 가지고 십자가의 길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용도가 다한 폐성물이 한실성지에서 ‘부활’을 맞는 셈이다.
마원성지에서 만난 두 사람
칼레 신부가 남긴 기록, 박상근 시복에 큰 도움
백화산에서 박상근과 작별한 후 칼레 신부는 1866년 10월 중국으로 넘어가 조선 재입국을 몇 번이나 시도한다. 하지만 건강이 쇠약해져 결국 본국 프랑스로 돌아가고 만다. 더는 선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는 조선을 위해 기도하는데 여생을 보내고자 시토회에 입회, 1883년 종신서원을 한다. 이어 따뜻한 프랑스 남쪽 모벡수도원으로 떠난 칼레 신부는 석달 후 선종한다. 마지막까지 조선을 위해 기도했던 그의 발에는 화환이 걸렸다. 선교사들에게 갖추는 장례 예절이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한편 박상근은 문경읍에서 체포돼 1867년 1월 상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향년 30세였다. 그의 무덤은 마원성지(문경읍 마원리)에 있다. 1985년 이장한 것으로, 원래 인근에 위치한 문중 산에 있었다. 103위 시성을 앞두고 후손의 제보로 1981년 그 소재가 가까스로 교회에 알려졌다. 안동교구에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정 신부는 “살아남은 칼레 신부가 교구 순교자 대표로 박상근 마티아를 복자로 만들어줬다고 본다”고 말했다. “칼레 신부님이 선종하고 70여년 뒤인 1957년이었어요. 그를 존경하는 시토회 수녀들이 칼레 신부님 전기를 썼는데, 그 책이 박상근 행적을 증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칼레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집을 토대로 쓴 내용이었거든요. 교구 설정 50주년인 2019년 우리 교구에서 번역본을 냈습니다."
마원성지 박상근 무덤 봉분 너머로 주님 부활상과 함께 칼레 신부와 박상근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에 영대를 두른 칼레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모습과도 닮았다. 박상근은 아전답게 감투(탕건)를 쓰고 있다. 158년 전 백화산에서 이별했던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를 향해 손을 내뻗으며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다시 만나는 박상근과 칼레
5월 29일 후손들, 한실성지에서 만날 예정
정 신부가 문득 보여줄 것이 있다며 품에서 검은 천 조각을 꺼냈다. 지난 2월 cpbc 다큐멘터리 촬영차 칼레 신부 고향인 프랑스 크리옹에서 찾은 ‘보물’이라고 했다. 칼레 신부의 로만 칼라 일부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칼레 신부 형의 외증손이 지니고 있었단다. 정 신부는 또 ‘찬미 여수’가 적힌 종이도 보여줬다. 칼레 신부가 집에 보낸 편지에 ‘조선에서 쓰는 인사말’이라며 쓴 글씨였다. ‘여수’는 초기 신자들이 ‘예수’를 부르던 말이다. ‘찬미 예수’ 인사말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칼레 신부였다.
정 신부는 “124위 복자 기념일인 오는 5월 29일 박상근 복자의 후손들과 칼레 신부의 후손들이 이곳 한실성지에서 만날 예정”이라며 기쁜 소식도 전했다.
5월의 봄날, 박상근과 칼레 신부가 만나고 헤어졌던 그 문경 땅에서 후손들은 함께 걸으며 볼 것이다. 두 사람이 끝까지 잊지 못했을 변치 않는 백두대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