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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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을 보는 것은 하느님에게 내가 보여지는 것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5) 방주의 틀 - 영원을 향한 창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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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원근법의 시각: 원근법과는 반대로 보는 주체가 그림 안에 있는 형태로 구사한다.


이콘 안의 세계가 하느님의 세계라면 
보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내가 ‘보여지는’ 원리

우리가 하느님께 
감출 것 없이 
보여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시공간적 삶의 차원



2.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심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다섯 살 어린 남동생과 다투다가 동생을 한 대 쥐어박았는데, 동생이 아버지께 일러 꾸지람을 들은 것입니다. 막내 여동생과 남동생은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해서 두 동생과 다투면 늘 나만 야단맞았죠.

어릴 적 난 내성적이고 조용했지만, 고양이처럼 얌전히 있다가도 건드리면 앙칼진 면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동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때리기만 한다는 아버지의 꾸지람에 속이 상해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행동에 화가나신 아버지께서 지게 작대기를 들고 쫓아오시는 게 아닙니까! 놀라서 막 달아났습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냇가로 달아나 하릴없이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다 멀리 사는 친구네 집에 가서 놀다가, 저녁 나절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습니다.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누구에겐가 ‘보여져야’만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보여져야 했기에 대문을 들락날락하고, 발에 무엇이 걸려 나는 소리도 냈습니다. 그래야 눈치를 채신 부모님께서 “들어와 밥 먹지 뭐하냐?”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본다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보여지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집이 무너질까 걱정이 될 때는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듯이 창문을 통해 누군가 나를 본다고 생각하면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콘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는 ‘보여지는’ 원리가 함께 있습니다. 이콘의 세상은 정화된 거룩한 세상이고, 성령께서 감도(感導)하시는 곳이기에 영원하신 하느님의 눈을 구성하는 원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출 것 없이 보여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시공간적 삶의 차원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걸음마 하는 아기를 데리고 밖을 나가면, 아기는 두 손을 들고 마치 병아리처럼 쪼르르 몇 걸음을 뛰듯이 걷다가 잠시 서서 뒤에 있는 엄마·아빠를 바라보며 웃고, 또 몇 걸음 쪼르르 뛰듯 걸어갑니다. 아기는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엄마·아빠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또 엄마·아빠가 있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최고의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로부터 ‘보여지는’ 위치에 있으므로 안정적입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과거제도에서처럼 어려움 없이 소년등과(少年登科)한 사람들을 요즘에도 종종 봅니다. 그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탄탄대로를 걸어 세상살이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원에 있는 소나무와 비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는 생김새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피와 땀과 눈물 없는 인생사는 융통성과 관대함이 부족해 이른바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본인 시각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본인이 본인을 제일 잘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삼자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만약 제삼자의 눈이 ‘영원성의 시선’이라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오신 ‘말씀’은 하느님의 시각이라는 것을 이콘에 넣는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시간에 의해 변하는 존재들이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바라본 모든 것이 내일이면 조금씩 변합니다. 모든 세상사는 내가 조금만 위치를 바꿔 바라보면 모양이 달라져 있습니다. 시각에 따라 그 관점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원성을 지닌 하느님의 눈은 추상적이지만 시간과 무관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세계의 이콘 안에서도 시간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콘 안의 세계가 하느님의 세계라면, 보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내가 ‘보여지는’ 원리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콘에서는 이를 위해 외부의 관점을 내부의 관점으로 돌려 바라보는 주체를 ‘변화하지 않는 영원성’으로 바꿉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밖을 바라보는 것인데 오히려 하느님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구성 체계가 바뀌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시선 안으로 포괄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나는 하느님의 세계에 참여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성을 바라보는 창문은 영원성이 강림하는 통로이며, 그 안에 있는 눈에 보이는 분, 즉 예수님 성모님 성인들을 통해 하느님과 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없지만 내가 보여지는 조건이라면 내 앞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가! 내가 ‘보여져서?’. 특히 배가 고픈 것처럼 보여진다면 “얘야, 들어와 밥 먹어라”하시지 않을까요!



3. 보여지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될까?

원근법에 따른 세계는 ‘보는’ 세계이므로 내가 주체가 됩니다. 원근법에 따르면 멀리 있는 것은 점점 작게 보이므로 많은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0층짜리 건물에 둥글게 원형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다고 합시다. 맨 위층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아래층 계단까지 점점 작아지며 무한히 연속적으로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역원근법의 시각: 원근법과는 반대로 보는 주체가 그림 안에 있는 형태로 구사한다.
원근법의 시각: 보는 사람 중심으로 물체의 거리감에 따라 화면에 묘사한다.


보여지는 세계는 보는 주체가 내가 아니고 하느님이므로 나도 그림 안에 동참합니다. 원근법에 따른 세계가 없다는 개념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면 원근법에 따른 모든 세계는 변화하고 언젠가는 없어질 세상이지만, 이콘에서는 그러한 세상이 아닙니다. 이콘의 세계는 하느님의 세계이므로 시간적 편차가 없는 세계이고, 모든 것은 동시에 있는 세상이며, 다양한 시선들과 시간이 한 공간 안에 형성됩니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즉 시간의 흐름에 방해받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느님 세계에서는 같은 순간에 공존합니다. 따라서 이콘에서는 다윗 왕과 요한 세례자와 근래의 성인들이 공존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김형부 마오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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