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7월 초 “조선으로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떠나라”는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의 편지가 오기 전에 저는 페낭에서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라미오 신부에게 조선 선교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편지를 보낸 바 있습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지금 마카오에 체류 중이지만 북당에서 사목하면서 청나라 황족의 후손인 도흠과 도민 형제에게 세례를 줄 만큼 북경 사정에 밝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제게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주교님의 편지를 읽고 제가 얼마나 큰 기쁨에 사로잡혔는지 모릅니다. 저는 큰 위안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조선으로 보낼 선교사이신 당신의 발에 입 맞춥니다. 이 선교지는 전적으로 프랑스 관할입니다. 이 왕국에 처음으로 십자가를 꽂은 것도 프랑스인이었습니다. 불행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우리 신부님 중 한 명도 조선에 파견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포르투갈 신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 선교지가 완전히 그들 손에 넘어간다는 조건으로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선교지를 양도하면서 우리는 문서로 작성하고 서명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선교지는 포르투갈인들의 권한으로 넘어갔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제안한 모든 계획 가운데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볼 때 아무것도 없습니다. 먼저 행동에 옮겨야 할 것은 몇몇 가난한 가족을 타타르와 조선 국경지대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들은 필요한 경우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거처나 은신처를 제공해주게 될 것입니다. 포르투갈 신부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주교님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조선까지 뻗어있는 선교지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주교님은 절대 입국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경교구 파견 선교사로 조선 입국 재촉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Pires Pereira, 1769~1838) 주교도 제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포르투갈 라자로회 출신인 그는 북경에서 사목하던 도중 구베아 주교에 의해 남경교구장 주교로 임명됐지만, 박해 때문에 남경으로 가지 못한 채 북경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박해 때문에 1808년 구베아 주교 선종 후 북경교구장 서리직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나는 조선 사람들에게 어느 유럽인 선교사가 그들 나라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 착한 신입 교우들은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동정하는 이 사제를 향해 멀리서나마 땅에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럽인을 입국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또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신부에게도 제가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는 페레이라 주교로부터 1831년 남경교구 총대리로 임명됐습니다.(필자 주- 카스트로 신부는 1838년 페레이라 주교가 선종한 후 총대리 자격으로 북경교구도 담당한다) 그는 “갑사의 주교님께서 원하시면 즉시 오실 수 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님께서는 갑사의 주교님께서 조선에 들어가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취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갑사의 주교님께 필요한 자금 전체를 제공해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들은 저를 매우 난처한 처지로 내몰았습니다. 제가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는 상황이 돼버린 것입니다. 페레이라 주교와 카스트로 신부는 제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 아닌 포르투갈 보호권 아래에서 남경교구가 파견한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누구한테 저의 재치권을 부여받게 될지 몰랐습니다. 제가 조선으로 떠나는 것을 포교성성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이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페낭 신학교에 있는 모든 동료에게 의견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다 달랐습니다.
그중 이탈리아 선교사로 한때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콘포르티 교수 신부는 눈물을 머금고 제게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은 포교성성에서 한 일이 아니라, 이 일의 결과가 어떨지 예측도 하지 않고 포교성성 대표부 신부가 제멋대로 경솔하게 내린 결정”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수아 앙투완 알브랑(Francois Antoine Albrand, 1804~1864) 지도 신부도 “적어도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주교님이 마카오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는지 의문
제 생각도 알브랑 신부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연달아 2통의 편지를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부님의 편지는 나를 큰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떠나는 것이 포교성성의 공식적 뜻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포교성성은 본의와는 다르게 이 새로운 조처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단호하게 표명했던 내 의지와 반대되는 조처입니다. 나는 교황 성하의 공식 파견 명령을 받고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
나는 결코 나의 선교지를 직접 선택하고자 하지도 않았고, 애원하거나 귀찮게 졸라서 조선 선교지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관리자로서입니까? 남경 주교의 부주교로서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니까요. 혹여 어떤 중국인 사제, 그러니까 나의 동료이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감독하는 사제의 재치권에 따라야 하는 단순한 선교사로서입니까? 이것은 알게 모르게 주교의 체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나와 밀접하게 연결된 파리외방전교회와 결별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로도 그렇고 보은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단지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행을 잘 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선교지의 업무들을 우리와 함께하기를 소망하고 이 선교지에 들어갈 역량이 있는 프랑스인 사제라면 모두 제 곁에 불러 모을 수 있는 권한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포교성성이 원하는 것이 진정 내가 즉시 떠나는 것이라면 아무 조건 없이 떠날 것입니다. 나는 교황 성하의 명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관련 사실을 내게 알려 주십시오. 내가 가르쳐 드리는 경로로 신부님의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나는 때맞춰 도착할 것입니다.”
포교성성, 중국인 여항덕 신부 조선에 파견
저와 페낭 신학교 교수 신부들이 우려한 대로 교황청은 조선 선교를 위해 또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포교성성은 1831년 1월 나폴리에서 사제품을 받은 중국인 여항덕(파치피코, 유방제라고도 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한 것입니다. 포교성성은 1828년 8월 23일 나폴리 성가정 신학교 학장 안토니오 갈라톨라 신부로부터 “1821년 유학 온 중국인 4명의 신학생 중 여항덕이 신학교 도착 후부터 계속해서 조선 선교를 희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항덕은 1795년 중국 섬서(陜西)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성장할 당시 중국 교회는 제6대 청나라 황제인 가경제(재위 1796~1820년)의 박해로 큰 혼란을 겪을 때였습니다. 여항덕은 24살 때 신학생으로 선발돼 산서 출신 첸 레오, 찬 바오로, 방 베드로와 함께 1821년 9월 1일 이탈리아 나폴리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신학교는 1732년 마태오 리파(Matteo Ripa, 1682~1746) 신부가 설립한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신학교였습니다. 포교성성 소속 중국 선교사였던 리파 신부는 북경 황궁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파견되기에 앞서 속성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는 궁정화가로 함께 있던 예수회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중국명 낭세녕, 1688~1766) 신부의 실력에 비해 크게 모자라 1724년 이탈리아로 귀국해야만 했습니다. 귀국 후 그는 고향 나폴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 신학교를 세우고 중국인 80명을 사제로 배출했습니다. 여항덕도 이 신학교에서 약 10년간 신학과 철학·수사학 등을 공부하고 1831년 1월 서른다섯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여항덕은 포교성성의 명에 따라 1831년 1월 27일 나폴리에서 출발해 그해 7월 31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에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포교성성 지침에 따라 조선 선교를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북경 주교에게 조선 선교에 필요한 모든 직무와 자금을 받기로 하고 1832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