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노드의 제1회기 종합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년 시노드 과정에 부제들·사제들·주교들이 더욱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중략) 우리는 그들 중 몇몇이 시노달리타스에 저항하는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노드 과정에 참여한 평신도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비해 사제들은 이 주제에 가장 덜 열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제들은 평신도·수도자들과 복음의 사명을 나누고 함께 걸어가기를 바라지 않는 걸까요? 그 사명을,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독점하고 싶은 걸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사제의 기쁨의 원천은 신자들과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을 살고 전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서로 존중하며 봉사하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이 사제들이 꿈꾸는 사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제들 안에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의심과 불안, 그리고 때로는 저항과 반발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몇몇 사제들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저를 비롯한 모든 사제가 마음 한구석에 공유하고 있는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종합보고서가 말하듯이, 교회는 이를 성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제들에게 시노달리타스란 어떤 의미, 어떤 느낌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저의 성찰을 부족하지만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있나요?
몇 년 전까지 들어보지도 못했던 낯선 용어, 번역하기도 어려워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들려옵니다. 세상 좋은 것은 여기 다 들어 있다는 듯, 여기 열광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사람처럼 몰아가는 분위기? 익숙했던 교회가 갑작스럽게 뭔가 낯선 것에 점령된 느낌입니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니 왠지 옛것은 벗어버려야 하는 낡은 것으로 취급받는 듯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와 육화, 그리고 구원의 신비에 포함되어 있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셨으며, 교회 안에서 실천되고 이어져 온 교회의 본질적 부분입니다.
사제들은 교회의 사람들이고, 매일 교회를 위해 일합니다.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그들에게 시노달리타스의 문제 의식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걱정과 희망에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기적의 해결법이라고 순진하게 믿지도 않습니다. 지나친 열광을 경계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방안들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새로움은 필요합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지금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성찰하고 실천해야 할 방향을 새로이 정리하고 강조합니다. 성령의 뜻을 찾아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찰과 회심,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쇄신이 필요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 타성에 젖어 안주하려는 유혹, 자기 합리화와 세속적 권위에 의존하려는 유혹, 편리함과 능률을 좇으려는 유혹들이 교회의 삶과 직무에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비움과 섬김의 모범이 우리를 흔들어 일깨웁니다. 지금까지의 사목과 사제들의 수고가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교회의 사명은 살아있고 늘 새로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종합보고서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오늘날 사제의 직무는 주교와의 관계, 사제단 안에서 그리고 다른 직무들과 은사들과 이루는 깊은 친교 안에서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다.” 자신의 직무를 혼자 힘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제는 없습니다. 신자 수가 수천 명에 관할 구역의 인구는 수만 명,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지닌 본당 공동체의 모든 일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면, 그 무게에 짓눌려 도망치고만 싶을 것입니다.
사제는 평신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당마다 봉사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난리입니다. 사목회를 구성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바빠지고, 종교에 관한 관심과 종교가 개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듭니다. 새로운 교육에 대한 공문이나 안내가 오면 바쁜 신자들을 모을 생각에 눈치부터 보게 됩니다. ‘함께 걸어가는 교회’라는 구호는 매력적이지만, 그 길의 험난함은 일선 사제들이 이미 맞이한 현실입니다.
신자 방문에 대해 반장·구역장님들은 말합니다. “저희가 열 번 방문하는 것보다 신부님이 한 번 방문하시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아요.” 본당 사도직 단체의 흥망은 구성원들의 신심이나 활동보다 신부님의 관심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본당의 날 메뉴는 신부님이 정해주셔야 신자들의 뒷말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직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이런 생각과 현실을 바꾸려면 그저 선한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 책임과 보편 사제직에 대해 교육해야 하는데, 바쁜 신자들을 모을 생각에 다시 머리가 아픕니다.
협력은 결코 저절로 되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배우지 못해서 낯설고 서툽니다. 북유럽에서는 수학 문제도 협력해서 풀도록 가르친다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경쟁만 배우고 협력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대학에서 협력을 배우라고 조별 과제를 내주면, 학생들은 협력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환멸을 배운다고 합니다.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할 ‘함께’가 힘겨운 감정노동이 되어버립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대로, 함께 가는 길은 결코 쉽고 빠른 길이 아닙니다. 이것이 유일하고 옳은 길이라는 믿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함께’라는 말의 의미
‘교회’라는 말에는 이미 ‘함께’가 포함됩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것, 서로 사랑하여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세상에 보이는 것,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교회가 지닌 구원의 길이요 보증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예수님 말씀대로 주인과 종이 아니라 벗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더 깊은 ‘함께’가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한다는 의미를 하느님 안에서 완성하자는 것입니다.
‘함께’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함께(with)가 존중과 협력의 관계를 말한다면, 그 반대말은 반대하고 맞서는(against) 관계일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깊은 ‘함께’를 말하려고 하는데, 때로는 이것이 서로 맞서자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평신도나 수도자의 참여, 담대한 발언, 그리고 그에 대한 경청이 마치 무슨 지분이나 권한을 두고 다투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괜한 갈등을 조장한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다 보면 갈등과 긴장, 오해와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쟁과 타협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과정입니다. 십자가의 수난이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듯이,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가장 참된 일치로 우리 모두를 인도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믿음을, 사제들의 거룩한 직무이자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의 표징인 성체성사 안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인사말로 매일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