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본 이철수 선생님의 ‘싹들 노래’라는 판화 그림 옆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콩 씨를 가려 성한 것만 밭에 심고 상해서 온전하지 못한 것들은 뒤 안에 내다 버렸습니다. 비 갠 어느 날 뒤뜰에서 그 못난 콩 씨들이 일제히 싹을 틔워 올리는 장관을 보았습니다. 다 살아 있었습니다.”
이 간단한 글은 나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한 동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하면서 상기된 채로 있었다.
‘싹들 노래’는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어떤 사람이든 귀하게 여기고 보살피는 일을 소명처럼 생각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나는 계속 사람들 사이로 그들을 보살피도록 보내졌고, 성한 듯 보이나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사별자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그만 울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주저앉고 싶은 이들이다. 사별 후에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이 고인을 충분히 애도하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를 지지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내 일이다.
지나온 사도직 현장에서, 특히 수도회 평신도 가족을 동반하면서 사별자들을 자주 만났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자칫 위로한답시고 내뱉는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되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을 잘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별가족을 동반할 이들을 양성하는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공동체든 사도직이든 가라면 가고, 하라면 하던 내가 ‘사도직 제안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도직명은 ‘사별가족동반’. 자매들에게 이 사도직에 대한 내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고, 평의회가 사도직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리하여 자매들에게 공모하여 얻은 ‘디딤돌’이라는 이름으로 사별자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최남주 수녀(베로니카,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