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학 시절 종종 ‘야인(jain)’이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ja)는 ‘그렇다’, 우리말로 ‘예’에 해당합니다. ‘아니요’는 ‘나인(nein)’으로 대답합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불확실할 때엔 이 두 단어를 합하여 표준어는 아니지만, ‘야인’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 성당에서 만난 아이 친구 부모에게 “당신의 자녀는 말을 잘 들어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하며 “야인” 또는 “나야(글쎄)”라고 답합니다. 생일 때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독일 아이들에게 “너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듣는다며?” 라고 물으면 웃으면서 “말 듣지 않는 것이 아니고요, 나와 생각이 달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콘이 창작 예술품이냐?”라고 묻는다면 “야인”으로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콘은 신앙생활에서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신앙의 내적 구심점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훌륭한 창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콘은 예술품이 아니고 복제품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점 하나까지 똑같이 복사하는 것이 무슨 예술이냐’라는 논리는 부분적이나마 수긍할 만합니다. 이콘을 예술의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진 못할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가 이콘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미술 분야를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술을 이콘으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에 접어들기 전, 유럽 성당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창문이 좁고 벽면이 넓은 까닭에 비잔틴 이콘을 응용한 프레스코화가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 후 이콘 화법을 응용한 르네상스 이전의 조토·치마부에·두치오·마사초 등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종교화와 조각품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르네상스가 지난 후 서방에서는 이콘이 전례에 관한 것보다는 고대 예술품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샤갈·말레비치·칸딘스키 등의 예술인은 이콘을 새로운 예술에 접목하기 위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콘을 급진적이거나 비전통적인 방법, 규범이나 현상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예술 세계로 이끌려 했습니다. 그것이 이콘의 예술성을 올리려는 시도일지 몰라도, 결국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교회 의식에 필요한 전례 도구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콘을 통해 왜곡·역원근법·이미지의 중첩과 병렬 등의 구성기법과 색채의 상징성·탈 물질적 방법으로 새로운 예술의 발견이라 했지만, 여기서 나온 작품은 이콘의 본래의 목적에 벗어난 유실물(遺失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콘 작가는 이콘이 창작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시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글로 되어있는 성경 내용을 그림 형태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콘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는, 전례 또는 기도를 위한 용도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이콘 작가는 본인이 그린 인물에 대해 존경과 기도와 묵상을 합니다. 또 흠숭하여야 할 ‘무한히 거룩한 분’의 숨결이라도 나의 손을 빌려 이콘 안에 내재해 계시기를 바랍니다. 전례용 작품은 전례를 위한 내용이 충실해야 하고, 품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콘을 새로운 개념으로 창작할 때 이콘 작가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성경 말씀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이콘을 구성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작된 이콘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그에 맞는 상징적인 표현을 살려 전체적으로 충분히 미적 감각으로 구성하였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창작된 이콘이 전례와 기도를 올릴 수 있는 품위있는 작품인지는 영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이콘 중에 ‘침묵의 성 요한’ 작품이 있습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다른 사도와는 달리 순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분으로, 그는 주님의 유언에 따라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신 분입니다. 훗날 그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가 요한 복음을 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침묵의 성 요한은 본인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를 표현하는 이콘입니다. 달리 해석하면 ‘내 생각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본인이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성령께서 천사를 통해 내 귀에 들려준 대로 기록하였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지만, 하느님의 말씀 의도를 정확히 기록해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형상화한 언어(그림)로 표현한다면, 그 역시 말씀의 의도를 잘 파악해 상징적인 구성과 규정에 따른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창작 이콘은 주로 수도원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고,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과 견해를 논의하고 그 결과를 이콘에 맞게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이콘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말씀을 ‘썼다’고 했습니다. 잘못 써진 이콘은 말씀을 오해의 소지로 이끌 수 있습니다. 또 수백 년 동안 이콘을 그려 온 수도원에서도 성경 내용에 근거한 성사실(聖史實) 이콘이 독창적으로 한 번에 창작된 적이 없습니다. 이콘은 기존 이콘에서 차츰 말씀의 의도를 좀더 분석해 표현하고, 거기에 그 시대의 심미적 관점에 따라 조금씩 색상과 약간의 구성 변화를 줌으로써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인물의 표현에 미세하나마 창작성이 가미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콘은 그 시대에 한 번으로 끝나는 성화가 아니고, 영성적 내용이 첨가되는 ‘진행 과정’에 있는 전례용·기도용 성화라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은 이콘이 정교회 그림이라는 인식에 반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면서 초기 교회, 카타콤바 벽면을 시작으로 그려져 왔으며, 그 후 동·서방 교회에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벽면을 장식하였습니다. 그 후 1054년을 기준으로 동·서방 교회가 갈라진 후 동방 교회에서 이콘이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성화상이라는 인식보다 그리스도교 미술이라는 긍지를 갖고 신자들이 묵상과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추상적인 성화를 보면서 묵상할 수도 있지만, 이콘처럼 예수님 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을 통해 하느님과 눈을 마주하며 기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이콘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현시대의 미적 감각을 살린 창작으로서 이콘이 가능하리라는 관점에서입니다. 이는 시대적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콘에서 예술의 시각만 강조한다면 그 실현은 요원할 것입니다. 이콘이 요구하는 규정과 미학을 연구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을 연결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콘을 복사해 새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콘은 이콘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제작 과정이 어려워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작가 자신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도자기 장인이 불가마에 도자기를 굽는 과정처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