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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합류한 김대건 신학생, 가장 먼저 사제품 받고 조선 입국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0.한국인 첫 사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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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화 (윤영선 작). 가톨릭평화신문 DB

유학 초기 성장통 겪은 김대건 신학생

마카오 유학시절 초기에 김대건 신학생은 스승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최양업)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천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포교지를 위해서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위병과 요통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아도 심각한 두통을 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그의 머리털은 회색이고 희고 누르스름한 색 등 온갖 색깔이 섞여 있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렇게 추한 머리털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뿐더러 그는 판단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9년 8월 11일 자 서한)

김대건은 세 소년 중 가장 늦게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라틴어 기초도 배우지 못한 채 유학길에 올랐다. 모방 신부는 본래 두 명의 소년만을 보내려고 했는데, 다시는 유학 보낼 기회조차 없을까 봐 걱정되어 세 번째 소년을 추가로 보냈다. 그 소년이 바로 김대건이었다. 또한 다른 스승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건은 생존 싸움과도 같은 유학 초기에 일종의 성장통을 겪으면서 학업을 해야 했다. 그 시절에 기후와 음식과 환경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유학생활을 하는 것이 쉬울 수가 있었겠는가? 김대건과 최양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서양어를 배우면서 공부한 최초의 유학생이라 할 수 있다.
 
1848년 그려진 장 바티스트 세실 초상화. 대영박물관 제공

세실 함장 통역 맡으며 영적으로 성장

김대건이 성장통을 이겨내기 시작한 것은 1842년 에리곤호를 타며 세실 함장의 통역을 맡을 때부터였다. 필리핀·상해·남경 등을 거쳐 가는 여행 중에 통역 자격으로 해외 견문을 넓히고 남경조약 조인식에도 참관인으로 참석하면서 병약하던 그의 기질이 나아지고 영적으로도 성장했다. 그 배를 함께 탔던 메스트르 신부는 “안드레아의 영혼과 육신을 돌보려는 저의 미약한 노력을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셨음을 신부님께 알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의 체질이 튼튼해지고 또 그간 중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던 신학 공부를 그가 이제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1843.3.1)라고 전하고 있다.

성장통을 극복한 이후 김대건에게서 발견되는 성덕의 두 가지 특성은 용덕(勇德)과 신덕(信德)이라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남긴 서한 중에 ‘훈춘 기행문’(1844.12.15)에는 그의 여행 중 일화가 담겨 있다. 장춘에서 훈춘으로 가던 중 한 객줏집에서 음력설을 맞이했다. 그곳 사람들은 설 첫날 자정까지 깨어서 새해 귀신을 맞이해야 한 해의 운이 좋다는 미신에 빠져있었다. 김대건은 여행에 지쳐 온돌방에서 자려고 했는데, 주인이 다가왔다. “일어나시오. 귀신들이 가까이 옵니다. 귀신을 마중 나가야 합니다.” 김대건은 무슨 귀신이냐고 되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기지를 발휘하였다. “여보, 잠깐 기다려요. 보다시피 나는 지금 잠 귀신에 접해있소. 지금 오는 귀신 중에 나를 이만큼 기분 좋게 해 줄 귀신이 또 있소? 제발 내 귀신과 조용히 즐기게 내버려 둬요. 당신이 말하는 그런 귀신들을 나는 모르오.” 그러자 주인은 홀로 중얼거리며 떠나갔다. 이처럼 김대건 신학생은 순발력으로 자연스럽게 미신도 떨쳐버리고, 여행을 위한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프랑스 화가 앙투앙 루(Antoine Roux)가 1830년 그린 프리깃함. 에리곤호도 이와 비슷한 외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부제, 나룻배 타고 서해안 횡단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육로로 국경을 통과할 때, 보초들에게 들킬까 봐 눈길을 맨발로 지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한양에 도착해 교우들을 만나 배를 구해서 서해안을 횡단하기로 했다. 출항할 때의 상황을 자신의 편지에서 전하고 있는데, “이리하여 음력 3월 24일(1845.4.30) 돛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교우들은 바다를 보고 아주 놀라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서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어디로 가느냐고 감히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일에 누구든 질문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거의 본 적도 없는 교우들과 작은 배로 서해를 건너가자고 하면 반대할 것이 분명하므로, 말도 없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서 질문까지 금지했던 것이다. 이 나룻배는 결국 풍랑에 휩싸여 전복될 위기에 놓였다. “‘이제는 끝장이다. 살아날 수 없을 거야’라고들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의 상본을 보이면서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간신히 풍랑에서 살아남은 나룻배는 지나가던 산동(山東) 배를 만나 줄에 묶여 상해까지 끌려갔다. 상해에 도착했더니, 그 배를 본 서양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저런 나무토막을 타고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하다니! 조선 교우들은 놀라운 신앙을 가졌다’고 감탄했다.
1925년 시복식 직후 복자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이 실린 「아날」 내지. 편의상 자필 서명지가 옆으로 실렸다. 위는 복자 샤스탕 신부의 것.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845년 김가항성당에서 사제품 받아

상해에는 마침 김대건 부제를 알고 있던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가 있었는데, 그는 김대건과 조선 신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의 청원에 못 이겨 김대건 부제부터 시작해 김대건의 통역으로 신자들에게 차례로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까지 봉헌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김대건에게 사제품을 주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김대건의 첫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가 타고 온 나무토막 같은 배를 수리하여 프리깃함으로 개조해 ‘라파엘’ 천사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이 배의 승무원 가운데는 신학생 최방제의 친형이었던 최형(베드로)·현석문(가롤로)과 같은 뛰어난 평신도 회장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힘든 뱃길 여정 끝에 마침내 10월 12일경 강경 부근 황산포에 도착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가 들어올 수 있었다.

가장 뒤늦게 합류한 신학생이 가장 먼저 사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에 들어온 김대건 신부는 성무 활동 이외에 서양 선교사들이 지속해서 조선에 들어오기 위한 뱃길을 개척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기 위하여 조선전도를 그렸는데, 이 지도는 조선에 있었던 팔도지도를 가지고 서해안을 좀더 자세하게 표시한 지도로 나타나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짧은 사제의 삶 안에는 천주를 “임자”로 부르는 ‘창조 신앙’과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순교 신앙’이 뚜렷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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