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는 여전히 낯설다. 이것은 아직도 입에 착 감기지 않는다. 그 때문일까? 지난 2021년 개막된 세계주교시노드 이후 우리 일상을 파고든 시노달리타스는 그동안 익숙했던 사고의 흐름을 막아 세우고, 그것이 무엇인지 되묻고 찾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점차 나와 공동체, 교회와 세상을 다시 듣고, 더 깊이 바라보게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수도회들 역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시노달리타스’를 묻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모처럼 더 선명하게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걷는 시노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공부해 가면서 수도회는 시노달리타스가 교회의 오랜 복음적 전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회들이 수행해오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음을 확인하게 됐다.
다만 교황께서 이번 시노드를 ‘시노달리타스적 교회’로 초대한 이유나 진의만큼은 충분히 알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왜 하필 지금 시노달리타스인가?’라는 물음을 찾아가는 여정이 곧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될 터이니 말이다. 그래야 교황의 시노드 개막 연설에서 드러난 것처럼 진정한 원의와 시노달리타스의 방향이 더 선명해질 테니까 그렇다.
교황은 ‘온 인류의 고난과 열망에 연대하여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 ‘서로 귀 기울이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식별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다시 상기해보면 이 초대의 말씀은 코로나19 팬데믹 공포가 전 세계를 뒤덮었던 바로 그 시점에 이루어졌다. 당시 우리가 받았던 충격과 무기력함·절망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이번 시노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더 선명히 알아들을 수 있다.
교황은 시노드가 단순히 회의나 여론조사, 혹은 형식적 틀이나 규정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시노드는 ‘교회적 사건(kairos)’이며, ‘사건’이어야 하고, 그래서 그 주도자는 반드시 성령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불어닥친 성령의 강력한 바람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시노드의 주제가 그러하다. ‘친교와 참여·사명’은 분열된 세상, 먹통인 세상,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상, 미래가 없는 세상에 희망이 될 것을 촉구하는 언어다. 그러므로 친교는 가톨릭 교인들끼리의 축제로 제한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며, 내쳐지고 지워진 얼굴과 목소리를 복원하고, 함께 어울려 광장을 이루라는 명령이다.
그들이 바로 우리 광장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올 때,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을 때야말로 우리는 비로소 시노달리타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친교는 모든 차별적 경계를 걷어내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언어는 그 자체가 가히 혁명적이다.
수도회의 시노달리타스 견인하는 총회
초세기 수도회 운동의 기원 역시 무너져간 교회에 불어닥친 성령의 바람으로 일으켜졌다. 복음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들어간 소수의 사람이 당시 암울했던 교회와 세상에 제시한 새로운 비전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수도자 운동은 역사의 고비마다 개혁적 고삐를 쥔 창설자들에 의해 다양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여 ? 하느님을 찬미하는”(사도2, 44-46) 초대 교회의 영감을 살아간다. 따라서 언제나 성공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복음적 이상에 따른 ‘가난과 정결·순명’의 서약이 시대마다 새로운 예언적 응답으로 드러나고자 노력한다.
그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유, 그래서 ‘상호 경청과 소통, 식별과 수행’이 삶의 당연한 과정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친교(koinonia)가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자신이 친교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현”(「시노달리타스」, 7항)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도회는 ‘설립 은사’에 의해 구조화되며, 이 구조가 저마다의 고유한 운영방식에 따라 시노달리타스적 삶으로 자리 잡는다. 이 여정의 정점에는 전 회원이 참여하는 수도회 총회가 자리하고 있다. 총회는 수도회의 최고 기구로서 고유한 은사와 사명을 다루는 가장 권위 있는 기구다.
수도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총회는 준비 기간만 보통 1년 이상이 걸린다. 이 시기 수도회는 나아갈 전망과 비전을 다루고, 우리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는’, 특히 고통받는 지구촌 신음에 ‘귀 기울이도록’ 초대받는다. 총회 전 과정은 은총과 불충이 뒤섞인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회심의 시간이자 회복의 시간인 동시에 우리가 외부에 세워뒀던 사람들, 피조물의 세계를 중심으로 환대하는 시간이 된다.
이렇게 찾고 두드리면서 모인 다양한 의견들은 수도회가 살아가야 할 시대적 소명으로서 ‘치유와 회복·희망의 비전을 알리는 선언문’으로 태어난다. 총회의 폐막이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기쁨과 희망의 축제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총회는 하느님의 지휘로 홍해를 건너는 엑소도스(탈출)에 비견되기도 한다. 총회를 이끄시는 분이 온전히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kairos)이 되기 위해서는 이 여정에 회원들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자신의 취약함 속에서도 결기에 차 있는지, 총회의 결정을 기꺼이 수락하는지가 관건이다.
따라서 수도회는 교황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수도회)에서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수도회)’가 되기로 작정하는 것,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힐 교회(수도회)’”(「복음의 기쁨」, 49항 참조)를 경계하는 여정이 되는 것이다.
분열과 상처로 얼룩진 세계 초대하고 회복
앞서 언급했듯이 경청과 친교·사명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가톨릭교회의 계층 간 단결과 친목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분열과 상처로 얼룩진 세계를 초대하고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물론 이런 과정은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과 공동체의 취약함을 절감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스스로 엄격해지는 동시에 공동체적 참회와 엑소도스적 시간(kairos)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을 속이는 쓸모없는 집단, 위선적 공동체, 불에 던져질 마른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도자들이 끊임없이 성찰하고 스스로를 지켜나가고자 전념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수도회의 시노달리타스를 견인하는 총회의 성격과 시노달리타스가 수도생활 안에서 왜 삶의 본질적 요소가 되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소개하고 나니 불현듯 걱정이 밀려온다. 그것은 마치 백지 한 장에 연필로 간단히 스케치해 놓고 다 이해해 보시라고 한 것만 같아서다.
교회 안에서 수도자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실제로 수도회들이 어떤 은사적 여정을 걷는지, 그 실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누구’가 되었든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함께’ 대오를 이루며 나아갈 때, 마치 샛강이 강을 이루어 바다로 모이듯 우리 역시 시노달리타스의 보편 교회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당장 복잡할 것도 없다. 소그룹이나 가족 간에 시노달리타스는 더 단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상호 존중을 담아 서로 깊이 듣고, 공감하며, 소통하면 된다. 그렇게 차츰 품을 넓혀가다 보면 ‘길’은 생겨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