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증거자’ 가경자 최양업(1821~1861) 신부. 그가 선종한 날인 6월 15일은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바라며 기도하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을 위한 전구 기도의 날’이다. 이는 주교회의가 올해 춘계 정기총회에서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복자품에 오를 때까지 전구 기도의 날을 지내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 교회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 시복을 위한 다양한 현양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그의 생애와 사목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희망의 순례’에는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전국 신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며, 가경자의 시복을 위한 전구 기도 활성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양업 신부 시복을 위한 전구 기도의 날을 맞아 ‘희망의 순례’ 여정의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고, 순례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땀의 순교자 만나는 ‘희망의 순례’
‘희망의 순례’는 한국 교회가 최양업 신부 선종 161주기를 맞은 2022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170여 년 전 엄혹한 박해 속에도 전국 교우촌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던 사제의 발걸음을 따라 최양업 신부의 탄생지부터 성장지·사목지를 거쳐 묘소가 있는 배론성지까지, 그와 연관된 성지와 교우촌·성당 등 30곳을 순례하는 현양 운동이다.
2021년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에 기대했던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교황청 시성부 기적심사를 통과하지 못하자, 시복을 위한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한국 교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현양 운동인 희망의 순례가 닻을 올렸다.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 시복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은 뜨겁다. 희망의 순례를 시작한 이래 순례 ‘필수품’인 책자 「희망의 순례자」(기쁜소식/1만 원)가 2만 8000여 부 팔린 것이 이를 방증한다. 「희망의 순례자」는 신자들이 지도와 주소를 따라 순례하면서 최양업 신부를 위해 기도하도록 제작된 책자로, 전체 30곳 순례지를 방문해 도장을 찍은 후 배론성지에 제출하면 원주교구장 명의의 축복장을 받게 된다.
그의 땀 위에 우리의 땀을 얹고
‘희망의 순례’를 시작한 지 1년이 된 지난해 6월 기준, 순례 완주 기념 축복장을 받은 이는 280여 명이었다. 이어 1년이 더 지난 올해 5월까지 누적 완주자 수는 860여 명으로 집계됐다. 하루 1.2명꼴로 완주자가 나오고 있는 셈. 적지 않은 이들이 순례를 완주하며 최양업 신부를 더욱 깊이 현양하고 있지만, 더 많은 이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의 뒤를 잇는 우리의 ‘순례의 땀’과 ‘기도의 땀’이 그를 시복시성의 영광으로 들어 올릴 수 있다.
아울러 희망의 순례 완주자 명부가 추후 교황청 시성부에 제출돼 시복 심사자료로 활용되는 만큼 최양업 신부 시복을 향한 여정에 더 많은 이가 함께해야 한다. 희망의 순례를 주관하는 배론성지는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지, 신부님을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순례하고 있는지 역시 중요한 심사 기준”이라며 “교황청 시성부의 시복 심사에서 기적 사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한국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를 얼마만큼 현양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한국 교회는 더 많은 이가 순례에 동참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배론성지는 지난 4월 전국 본당과 성지 등 1800여 곳에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 명의의 서한과 희망의 순례 참여를 안내하는 포스터 등을 발송해 순례의 취지를 거듭 알렸다. 조규만 주교는 서한에서 “우리나라에 순교 성인들은 많지만, 성덕의 삶을 산 증거자로서의 성인이 없는 상황”이라며 “최양업 신부님이 시복시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희망의 순례 안내 포스터를 본당에 게시하고 이 순례에 동참해 주시길 청한다”고 호소했다.
묵주 기도로도 함께할 수 있어
최근엔 몸이 불편하거나, 개인 사정으로 순례가 어려운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최근 개정 발간된 「희망의 순례자」에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기원 묵주 기도 여정’이 추가돼 ‘희망의 순례’ 총 3650㎞를 묵주 기도 1단에 1㎞씩 대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책자에 표시된 지도를 참조해 묵주 기도 3650단을 바치면 완주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최양업 신부를 위한 순례의 불이 지펴져 본당 차원에서 희망의 순례에 동참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서울대교구 창4동본당(주임 도창환 신부)은 올초 순례 책자 1000여 부를 구매해 신자들에게 나눠주며 순례를 독려했다. 지난달 16일에는 도창환 신부와 신자 41명이 대형버스를 빌려 가경자의 탄생지 청양 다락골성지 등을 순례했다. 김창화(플로렌시오) 본당 사목회장은 “내년까지 본당 전 신자가 희망의 순례에 동참하는 것을 목표로 모두 열정적으로 순례에 임하고 있다”며 “올 가을에도 본당 신자들이 순례에 임하도록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어 “신앙 후손으로서 한국 교회에 신앙이 뿌리내리도록 헌신하신 최양업 신부님이 시복되도록 계속 우리의 땀과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책자 「희망의 순례자」는 전국 교계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순례 관련 문의 : 043-651-1821, 배론성지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339번째 완주자 윤주현(엘리사벳)씨
“차박해가며 2개월여 만에 완주
‘울산 죽림굴’ 가장 기억에 남아”
“신앙 선조의 헌신이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곧 한국 가톨릭 신자의 소명이라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최양업 신부 관련 순례지 30곳을 찾는 ‘희망의 순례’를 2개월여 만에 완주하고 축복장을 받은 이가 있다. 339번째로 순례를 완주한 윤주현(엘리사벳, 서울 노원본당)씨다.
윤씨의 ‘희망의 순례’는 지난해 3월 전국 성지 순례 완주자 축복장 수여식에서 만난 한 신자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다. “자매님께서 희망의 순례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곧장 「희망의 순례자」를 들고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전국 성지를 완주한 경험이 있었지만, 다시 일상과 순례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씨는 희망의 순례지 30곳 가운데 단체로 방문한 3곳을 제외하고 27곳을 혼자 순례하며 꿋꿋이 순례 여정에 임했다. 숙소를 잡기 어려운 경우엔 공원과 성당 등지에서 차박까지 하며 열정적으로 순례했다.
“혼자 운전하면서 순례를 다니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식구들 역시 그렇게까지 하는 저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죠. 하지만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전국을 누볐던 최 신부님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따라간다는 마음으로 순례했습니다.”
윤씨는 여러 순례지 중 울산 죽림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죽림굴의 가파른 길을 오가며 오직 신자들의 신앙을 위해 왕복 2시간 넘는 산길을 오르내리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최양업 신부의 열정적인 선교정신을 깊이 느낀 기회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군산 신시도 체류지를 순례할 때에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직 신앙만 생각했던 최 신부의 마음을 묵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윤씨는 완주 후 삶에서도 ‘희망의 순례’를 이어가고 있다. 직장 내 자신의 자리에 최 신부 사진을 붙여놓고 전구 기도를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희망의 순례를 통해 최양업 신부님의 삶과 신앙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면 이렇게 기도를 바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후손으로서 지금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신부님께서 시복되시는 겁니다. 모두가 더 열심히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