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성실하게 교리를 지키고 성직자와 교우들을 위해 힘썼다. 그들의 우직함은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웠을 모진 고문도 이겨내게 했다. 중요한 직책이나 화려한 업적을 세우진 않았어도, 그들만의 순수하고 곧은 신앙으로 교우들의 모범이 됐던 성 손자선(토마스·1943?~1866)과 복자 허인백(야고보·1822~1868)을 소개한다.
농사처럼 성실한 신앙생활
성 손자선 토마스는 1843년경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믿는 부유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주교 신심과 가풍을 지키며 대대로 살아온 집안에서 교육받은 성인은 점잖고 근면한 성격에 기도 생활도 열심이었다고 전해진다.
농사는 물론 모든 일과에 굉장히 충실했는데, 일하지 않을 때도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충실하고 모범적이지만 단호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교우들은 성인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성 손자선, 신심 깊은 부유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
선교사들 직무 앞장서 돕고 두려움 없이 순교 받아들여
복자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경남 김해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땅을 일구며 사는 농부로 지내던 중 24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했다.
복자 또한 천주교 교리와 계명을 어찌나 성실히 수행했는지 교우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복자는 아내 박조예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며, 특히 입교 후에는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다.
용기와 기백의 성인, 애덕과 희생의 복자
성 손자선은 충청도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에 열심이었다. 성인은 순교 사료를 모아 신부들에게 전달하는 등 조선에 들어온 성직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했다. 워낙 교류를 잘하다 보니 성 다블뤼 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성인의 집에서 공소예절과 교회전례를 행하는 것을 상례로 여길 정도였다. 또 박해 중에는 성직자들이 그의 집에 피신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이가 젊다 보니 교회 직무를 맡아 본 적은 없었다.
성인이 모범적일 뿐 아니라 단호하고 용감한 성격도 지녔다는 것은 병인박해 때 드러났다. 1866년 3월 어느 날, 포졸들이 성인 가족과 교우들이 살던 거더리 마을을 샅샅이 뒤져 돈과 온갖 물건들을 압수했다. 그리고선 “돈과 물건들을 찾아가려면 사람을 보내 주인임을 증명하고 찾아가라”며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교우를 색출하기 위한 함정일까 무서워 아무도 관가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성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덕산 관가에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관가는 돈을 내주기는커녕 성인을 잡아 옥에 가둬버렸다.
복자 허인백, 경남 김해 농부 집안…24세 때 입교
가난한 사람들 위해 애덕 실천…죽음 앞에서 오히려 기백 드러내
한편 복자 허인백은 애덕실천에 열심이었다. 복자에 관한 자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줬다고 전한다. 인내와 겸손, 애긍이 뛰어났던 복자는 사순 시기가 되면 항상 희생, 극기하며 가난한 사람의 집에 양식을 몰래 갖다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혔으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병든 이를 힘써 돌봤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교우들이 복자를 신덕자(信德者)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복자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돼 무수한 매질과 문초를 받고 8개월간 옥에 갇혀 지냈다. 아내 박조예는 구걸로 밥을 얻어다 옥에 갇힌 남편과 동료들에게 갖다 줬다. 복자는 몸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옥중에서 짚신을 삼아 푼돈을 벌어 어려운 이를 도왔다.
철종이 박해 중단 명령을 내리면서 풀려난 복자는 가족을 데리고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의 산중으로 이주해 나무 그릇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거기서 복자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죽령 교우촌은 다른 교우촌에 비해 안전한 장소였다.
용기, 그리고 기쁨의 순교
용감하게 관가에 나갔다가 체포된 성 손자선은 악랄한 고문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곤장을 맞다 못해 다리가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포졸들이 뿌려대는 온갖 오물을 받아내며 조롱받기도 했다. 버티는 성인의 모습이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 공주로 압송했다. 압송될 때는 고문으로 이미 다리가 부러진 상태라 동료에게 업힐 수밖에 없었다.
성인은 배교하라는 명령에 “죽는 것도 무섭지만 저의 왕이시고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그보다 천배나 더 무섭다”며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온몸이 망가지는 고문을 견딘 성인은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공주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1868년 복자 허인백과 함께 활동하던 동료 두 명이 함께 체포됐다. 포졸들이 기어코 죽령 교우촌을 찾아낸 것이다. 또다시 문초와 고문을 받았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신앙인임을 드러낼 뿐 그 어떤 정보도 밀고하지 않았다.
복자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압송될 때에도, 울산 좌병영에서 사형판결을 받을 때도 오히려 즐거워했다. 좌병영에서 사형 집행을 당하던 날 마지막 술상이 차려지자, 순교를 앞뒀다는 기쁨에 술잔을 그의 두 동료에게도 권하면서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명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외칠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춤을 추며 형장에 들어간 복자는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부인 박조예가 복자의 시신을 눈물로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