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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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에 소신 굽히지 않은 삶, 덕망과 지성 갖춘 신앙인의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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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가톨릭교회의 믿음 속에서 가톨릭교회의 믿음을 위하여 죽습니다. 국왕 폐하의 신실한 종복임을 자처하지만, 그 이전에 순명하는 주님의 종인 까닭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위대한 영국의 인문주의자, 「유토피아」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 성인이 1535년 7월 6일 단두대에서 남긴 말이다.
영국교회 수장인 왕의 권위를 부인했다는 명목으로 런던탑에 감금돼 처형된 그는 출중한 법률가, 한 나라의 대법관으로서 권력과 부를 모두 지녔어도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위에 두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권력을 굽히지 않으며 불의 앞에서 신앙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삶으로 보인 인물이었다. 1935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성된 토마스 모어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정치인과 정치가의 주보 성인’으로 선언됐다. 6월 22일 토마스 모어 축일을 맞아 신념과 정의를 위해 금력이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성인의 신앙과 인품을 살펴본다.



법률가 가문에서 출생


토마스 모어는 1477년 영국 런던의 한 법률가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최고 명문인 세인트 앤소니 고등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1500년 22세의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던 그는 문학 수업도 게을리하지 않아 고전작가들을 열심히 연구했다. 한때는 사제직에도 관심을 갖고 카르투시오 수도회에서 4년 동안 지내며 수도 생활을 체험하기도 했다. 특별히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 매료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자신에게 성소가 없다고 판단했고 평신도의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수도원에서 익힌 기도와 단식 참회의 생활을 잊지 않으며 평생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 새벽 2시에 기상해 7시까지 공부하고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1501년 제인 콜트와 결혼한 그는 런던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상법 전문가로 명성을 얻는다. 런던시 전속 법률가로 공정함과 빈곤 계층을 위한 헌신적 노력을 펼쳤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양로원을 세우며 시민들을 변호했다. 이런 모습은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네 자녀를 두었으나 출산 후유증으로 제인이 사망하자 미들턴과 재혼해서 새롭게 가정을 꾸렸던 성인은 부인과 자녀들에게 음악과 언어를 가르치는 등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몫도 충실히 했다. 첼시에 있던 그의 저택은 당대 지성인들의 중심이 되었고 에라스무스, 콜렛, 그로우신 등 유명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헨리 8세와 정치 이력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토마스 모어의 정치 및 외교 경력이 빛을 발한다. 런던 부시장을 거쳐 플랑드르(현 벨기에) 외교 사절로 파견됐으며 1520년 궁중에 들어가서는 유능한 업무 처리로 왕의 신임을 받아 비서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유토피아」는 이 무렵 저술됐다. 그는 루터에 맞서 헨리 8세가 ‘7성사 옹호론’을 제시할 때 초안을 쓰기도 했는데, 헨리 8세는 이 글로 레오 10세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호칭을 받았다. 


이후 1521년 재무차관으로 임명되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외국 사신 접대뿐만 아니라 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왕의 이름으로 서신 답장을 쓰기도 했다. 1523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어서는 진정한 언론의 자유에 관해 연설했다. 1525년 북잉글랜드 행정과 사법을 감독하는 직책에 올랐고 1529년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이처럼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정치적 조언자 및 협력자, 복잡한 외교 문제의 해결사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대화 상대로도 헨리 8세의 곁을 함께했다.


권력의 탄탄대로를 걷던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소송이 벌어지며 다른 길을 마주하게 된다. 국왕의 이혼과 재혼에 대한 소용돌이 와중에 대법관에 임명됐지만,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일자 반대 목소리를 내며 점차 국왕과 멀어지게 됐다. 1530년 교황청에 보낼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요청 편지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1531년 영국교회가 ‘국교회’라는 이름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 선언을 하자 대법관직을 사임했다. 


1533년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을 왕비로 책봉하자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아 왕의 분노를 샀고, 마침내 1534년 모반 대역죄로 기소 감금돼 이듬해 7월 6일 참수됐다.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한 달간 매달려 있었다.


세상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 청백리(淸白吏)


토마스 모어가 런던탑에 갇혀 왕의 회유와 압박을 받을 때 일화가 있다. 딸과 부인이 찾아와서 마음을 돌릴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토마스 모어는 “내가 양심을 어겨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그 대가로 형벌을 면한다고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 동안 더 재미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부인이 “한 20년쯤…”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이요”라고 말했다.


그가 성인인 이유에 대해 박재만 신부(타대오·대전교구 원로사목자)는 한 글에서 “무엇보다 일상에서 은총에 협력하면서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고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의견을 냈다. ‘군주의 분노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토마스 모어의 태도는 모든 것의 중심은 주님이신 하느님께 향해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뛰어난 인문학자, 법률가, 한 나라의 대법관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세상 속에 깊숙이 관여한 토마스 모어의 삶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을 보여준다. 은총 안에서 성화된 자유로움은 가정과 재물, 국가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았다. 세상 안에서 완덕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평신도 영성을 모범적으로 살았던 것으로 평가되는 성인이다.


법률가,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그는 정당들이 주는 선물을 받지 않았고, 몰염치한 부자들을 부끄럽게 했고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에게 법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도록 판결했다고 한다.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념이 잘 드러난다. “이 점 하나만은 자네에게 사나이의 일언으로 밝혀두고 싶네. 가령 어느 소송에서 옳은 판결을 바라고 법정에 온 사람 중 한편은 나의 부친이고 다른 한편은 악마라고 할 때 악마 측이 옳다면 악마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겠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다양한 길을 통해 완덕에 이를 수 있음이 언급됐다.( 「교회헌장 」 5장 참조) 이미 토마스 모어 성인은 평신도들이 가정과 직업과 사회생활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 뜻에 따라 맡은 자리의 소명을 다하며 성화 되어야 함을 드러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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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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