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20) 김정식(안드레아) 치과의사
고 선우경식 원장보다 2살 더 많은 김정식 치과의사. 선우경식 원장은 떠났지만 그는 한결같이 요셉의원을 지키고 있다.
환자 대부분 치아 관리 안 돼 못 먹어
그들이 맛있게 밥 먹는 모습 내겐 선물
꾸르실료 연수 후 봉사하고 싶었을 때
의사 찾던 고 선우경식 원장과 인연
초창기 군대용 접이 의자 놓고 진료
아들인 가수 김동률 통 큰 후원
44살에 시작해 여기서 청춘 바쳐
요셉의원 떠나면 내 삶 의미 없어
“큰 아들이 13살 때 제가 치과 진료를 시작했으니까. 참?뭐랄까. 37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오래됐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십 대였던 아들은 오십 대가 됐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봄 여름 가을 겨울이 37번씩 찾아오는 동안 서울 신림동과 영등포역 쪽방촌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여름에는 장맛비 고인 골목을, 겨울에는 눈 쌓인 길을 걸었다. 계절은 바뀌어도 그 골목에는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누워있는 알코올 중독자, 치아가 다 빠져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노숙인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빈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가 37년 동안 끊임없이 무료 진료를 해온 이유다.
흰 의사 가운을 입은 그가 환하게 웃는다. 가운 왼편에는 이름 석 자가 자수로 새겨져 있다. 올해 여든 살이 된 김정식(안드레아, 서울 삼성동본당) 치과의사로, 오랫동안 요셉의원을 찾는 노숙인들과 함께해온, 의료봉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강남역 인근에서 운영하던 그의 개인 치과는 30년 전 일찌감치 문을 닫았지만, 이곳 요셉의원에서의 진료는 현재진행형이다.
“요셉의원은 내 삶의 근원이지요. 하느님의 부르심이었고? 신자로서 선택받은 것이죠. 희생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안 해봤어요. 환자들을 마주할 때 뭐랄까,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여기를 떠나면 내 삶은 의미가 없어요.”
감정이 복받쳐 목이 멘 그는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여기 오는 분들 대부분이 치아 관리가 안 돼서 못 먹는 사람들이에요. 밥도 씹어서 넘겨야 맛있지, 이가 아파 잇몸으로만 죽이나 미음을 대충 넘기는 게 무슨 맛이 있겠어요. 전혀 씹지 못하던 환자가 틀니 맞춰서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는 거 보는 게 저의 기쁨이지요. 그들이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 그게 제겐 귀한 선물이에요.”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위해 동행했던 선우경식 원장과 김정식(왼쪽) 치과의사. 요셉의원 제공
진료실 벽에 요셉의원 이념과 사명이 걸려 있다.
그가 요셉의원을 설립한 고 선우경식(요셉, 1945~2008) 원장과 인연을 맺은 건 1983년경. 세례를 받고 꾸르실료 연수를 다녀온 후였다. “당시 신촌에 치과를 개원했는데 건물 위층에 선우경식 원장과 친한 동기가 정신과를 개원한 거예요. 놀러 갔다가 우연찮게 만났죠. 근데 선우 원장이 의사를 찾던 중이었어요.”
꾸르실료에 다녀온 후 봉사를 하고 싶었던 그는 선우 원장과의 만남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1987년 선우 원장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설립한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1997년 관악구의 재개발사업으로 요셉의원은 영등포역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37년 동안 진료한 환자는 1만여 명. 진료 시간만 7000시간이 넘는다. 한 주일에 하루 그가 진료하는 환자는 10~15명 선이다.
“환자들의 치아 상태를 보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치아를 관리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90는 아예 내버려두니까요. 대부분 치아가 흔들려서 오는데 이를 뽑을 수밖에 없죠. 충치는 치료라도 가능하지만 치주염에 걸려 흔들리는 치아는 빼는 것 말곤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의 37년 봉사 인생에는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열악한 진료환경이었다. 초창기에는 치과용 유닛 의자가 없어 군대용 접이식 의자를 썼다. 가장 큰 일은 초창기부터 함께 봉사했던 선우경식 원장이 세상을 먼저 떠난 일이다.
“선우 원장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선우 원장이 암 투병하는 걸 보고 하느님을 원망했죠.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데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 게 어디 있느냐?’ 라고요.”
그는 선우 원장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몇 달간 요셉의원에 못 나왔다. “생전 선우 원장은 혼자 행정 일도 보고 환자도 진료하고 1인 7역을 했거든요. 그런데 선우 원장이 떠나고 1년이 지나 원장 신부님이 처음 부임하고, 요셉의원 진료 시스템의 체계가 잡혀가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이것이 하느님이 선우 원장을 일찍 부르신 이유인가?.”
이후 그는 줄곧 환자 곁을 지켰다. 인술로 선우 원장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함께 봉사해온 의사들, 간호사와 직원, 봉사자와 신학생들은 이제 모두 가족이 됐다.
김정식 치과의사가 요셉의원에서 환자에게 틀니를 끼워준 후 설명하고 있다.
아들의 통 큰 후원도 든든한 힘이 됐다. 아들은 요셉의원이 영등포역 쪽으로 이전할 당시 필요한 진료 도구와 장비를 다 마련해줬다. 20년 동안 해마다 2000만 원씩 기부한 데 이어, 7년 전부터는 매달 100만 원씩 후원금을 내고 있다. 가수 김동률씨가 바로 그 아들이다.
“동률이가 전람회 멤버로 활동할 당시 선우경식 원장의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 시절에 음반 작업을 하는 데 선우경식 원장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계속 후원하는 거고요. 물론 제가 봉사를 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웃음)”
요셉의원에 오랫동안 거액을 후원해온 김동률씨는 요셉의원이 후원자를 위한 행사에 여러 번 초대했지만 한사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요셉의원에 오면 우선 선우 원장 사진을 보고나서 진료를 시작해요. 늘 보고싶고 그립죠. 요셉의원은 당신이 떠났어도 잘 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천국에서 편안하게 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그는 “44살에 시작해 여기서 청춘을 바쳤다”며 “요셉의원을 떠나면 내 삶은 의미가 없다”고 털어놨다. “하느님이 이렇게 건강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나올 것”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아들의 노래를 묻자, ‘동반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부를 줄도 안다”고도 덧붙였다. 선우경식 원장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기엔 우매했던 긴 시간의 끝이 / 어느덧 처음 만난 그때처럼 내겐 아득하오 / 되돌아가도 같을 만큼 나 죽도록 사랑했기에 / 가혹했던 이별에도 후횐 없었다오 / (중략) / 가슴에 물들었던 그 멍들은 푸른 젊음이었소 / 이제 남은 또 다른 삶은 내겐 덤이라오 / 긴 세월 지나 그대의 흔적 잃어도 /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 살아만 준 대도 / 그것만으로도 난 바랄 게 없지만 / 행여라도 그대의 마지막 날에 / 미처 나의 이름을 잊지 못했다면 / 나즈막히 불러주오.”(김동률의 ‘동반자’ 중에서)
그의 눈길은 다시 선우 원장의 사진을 향하고 있었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