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제게 이런 은총을 주셨습니다. 몸조심하시고, 이제 다른 이들을 돌보십시오.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내 삶의 가장 큰 은총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수난받는 것입니다.”(1950년 11월 25일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가 만포 하창리 수용소에서 선종하기 전 퀸란 주교와 부드 신부에게 남긴 유언)
한국 가톨릭교회는 6·25 전쟁 전후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박해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 가운데 하느님의 종 116위를 선정해 시복 재판을 추진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가운데 78위와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동료 순교자 36위’가 그들이다.
또 이들 가운데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와 성 베네딕도회 덕원 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신상원 주교 아빠스를 비롯해 북한에서 납치돼 옥사하거나 피살된 하느님의 종이 모두 73위다. 이들 대다수는 6·25 전쟁 이전에 체포됐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서울·대전 등 남한에서 체포돼 북송된 뒤 중강진을 거쳐 만포 하창리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과 수용소 생활로 순교한 하느님의 종들은 패트릭 번 주교를 비롯해 11위가 있다. 나머지 32위는 서울·춘천·강릉·대전·전주 등 남한에서 공산군에 의해 처형됐다.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 발발 74주기를 맞아 ‘6·25 전후 순교자들’이 당시 겪은 상황을 다시 들여다봤다. 전쟁 전후 공산주의자들이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평신도들에게 자행한 박해 과정을 간략히 정리했다.
6·25 전쟁 전후 북한 교회
해방과 함께 38도선을 경계로 우리 민족은 ‘분단’됐다. 단순히 지리적 가름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로, 삶을 지탱하는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었다. 가톨릭교회는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의 가르침에 따라 무신론을 단지하고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는 5만여 명의 가톨릭 교우와 20만여 명의 개신교 신자가 있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정은 1945년 9월 20일 북한 통치에 관한 훈령을 통해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소련군정과 북한 공산주의자 지도부는 ‘제한-탄압-말살’이라는 3단계 과정을 통해 종교 말살 정책을 펴면서 교회를 박해했다.
1945년 10월 북한 교회에서 첫 순교자가 나왔다. 강창희 야고보(1912~1945)다. 그는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의 지시로 1945년 10월 평양시 북한 노동당 인민위원회와 교섭해 주교좌 평양 관후리성당 부지를 반환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평양시 인민위원회로부터 받은 문서에는 영구 반환이 아니라 ‘일시 대여’로 명기돼 있었다. 그는 그날 인민위원회를 찾아가 항의하고 귀가하던 길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순교했다.
북한 당국의 교회 박해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1946년 3월 5일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공포, 교회가 소유한 토지를 전부 빼앗았다.
첫 먹잇감은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과 함흥대목구였다. 수도원과 성당, 신학교, 농장, 병원 등 자급자족하는 자치수도원구를 형성하고 있던 덕원 수도원은 수백 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한 당국은 1948년 12월 1일 덕원 수도원 재정 담당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를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 5월 8~9일 이틀에 걸쳐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독일인 수도자 34명과 한국인 신부 4명을 체포했고 한국인 신학생과 수도자 등 99명을 추방했다. 그리고 수도원에 딸린 모든 건물과 땅을 몰수했다. 이로써 덕원 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는 폐쇄됐다.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독일인 성직자 수도자 67명은 평양과 함흥 등의 인민교화소에 갇혔다가 ‘옥사독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리고 6·25 전쟁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겪으면서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25명의 독일인 수도자들이 순교했다. 또 김치호·구대준 등 11명의 한국인 신부와 2명의 한국인 수녀도 함께 순교했다.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는 덕원 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 폐쇄 소식을 듣고 “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한 종교 박해로 북조선 정권 헌법에 위배된다”며 북한 당국에 즉각 항의했다. 그러면서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일을 빌미로 북한 정치보위부는 1949년 5월 14일 “남한과 연락했다”는 이유로 홍 주교를 체포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1949년 12월까지 평양대목구 사제 9명을 체포했고, 6·25 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에 4명, 6월 27일에 1명 등 평양대목구 사제들을 체포했다. 평양 인민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옥에 갇혀 있던 홍 주교와 사제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1950년 9월 23일부터 10월 18일 사이에 북한 당국에 의해 모두 총살돼 순교했다.
이처럼 북한 교회 성직자와 수도자·평신도 지도자들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박해받아 순교하고, 1949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정치보위부의 주도적인 체포로 갇혔다가 평양 교화소와 옥사독 수용소 등지에서 총살되거나 굶주림으로 순교했다.
6·25 전쟁 전후 남한 교회
“미군정 체제가 한국을 보호해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소련의 입장에서는 북한을 앞세워 밀고 내려오기에 유리한 불안정한 체제다. 남한 정부와 우익 세력들은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보다 철저한 반탁, 반공 논리에 따라 남한만의 정권 수립을 정당화하는 근시안적 안목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헨리 대주교가 1948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총장 마리난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해방 이후 한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후 ‘3년 이내 한반도에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발한다’고 정확히 예견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분단된 한반도 정세를 인정하지 않을 것 △불안정하고 한시적인 미군정 체제가 필연적으로 전쟁을 불러올 것 △중국 공산화 △남한 정부와 우익 세력의 국제 감각 결핍 등을 이유로 전쟁 불가피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국의 한국군 육성 및 군 장비 지원 △미군의 한국 주둔 등 한반도 전쟁 방지 및 억제책을 제시하며 성골롬반외방선교회와 메리놀외방전교회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선교사들의 우려에도 미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이 군사 전략상 필수적인 곳이 아니라고 판단해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 후 주한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다. 그 결과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은 한국 교회가 겪은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다. 남한 교회는 6·25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 정당화했다. 나아가 참상에 시달리는 교우들에게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렬히 적을 공격하라”고 독려했다.
남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모든 지방 성당과 수도원에서 예외 없이 제의와 성물, 그 외에 남았던 물건 전부를 약탈했고, 성상의 목을 끊고 총을 쏴 파괴하고, 제대 감실에 사격의 표식을 만들어 총질해 능욕했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자 참조)
“대전에서는 성당과 감옥에서 많은 신자가 살해되었으며, 제의에서 찢어낸 천 조각으로 사형자의 눈을 가리기도 하였다. 강계에서는 감실에서 성체를 끄집어내서는 조롱하는 몸짓과 함께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들은 이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자세히 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신부들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성체를 짓밟았다.”(「기억의 돋보기-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 중)
북한군은 성당과 성상만 훼손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수도자·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고문하고 죽였다. 전쟁 발발과 함께 춘천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1950년 6월 27일 소양로본당 주임 앤서니 클리어 신부를 총살했다. 6·25 전쟁 중 남한 교회 첫 순교자다.
북한군은 그해 7월 2일 춘천대목구장 퀸란 주교와 선교사들을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11일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 및 가르멜회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들을 체포해 소공동 빌딩 지하에 억류했다. 또 목포에서 체포된 브레넌 몬시뇰을 비롯한 사제들과 수도자, 평신도들을 붙잡아 대전형무소에 가뒀다가 1950년 9월 24일께 처형했다.
번 주교와 퀸란 몬시뇰 등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은 미군 포로 700여 명과 함께 1950년 9월 5일 기차로 압록강에 인접한 만포 외곽 수용소로 이송됐다가 그해 10월 31일 만포에서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눈 내리는 추운 산길 160㎞를 얇은 옷만 입고 걷는 동안 가르멜과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은 얼어 죽은 이들을 위해 ‘깊은 구렁 속에서’로 시작하는 시편 130편과 묵주 기도를 했다. 이 길에서 순교한 11위가 시복 대상자다.
서울 수복 이후 남한 교회는 북한군보다 좌익 세력에 의한 피해가 더 컸다. 합덕과 김제 수류본당 등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보도연맹원에게 끌려가 고문받고 처형된 교우들이 적지 않았다. 또 빨치산이 기습해 교우들을 성당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6·25 전쟁은 한국 교회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참상이다. 교회는 박해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영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었고 또 얻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아울러 교회는 반대자들이 왜 반교회적 태도를 보이는지 경청해야 하며, 대화 또한 나누어야 한다.(사목헌장 44항 참조) 한국 교회가 6·25 전후 순교자를 시복시성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